2012. 3. 27. 19:2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창가에 햇살이 /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정상적으로 군대를 마쳤다면 82학번이 3학년일 때부터 79학번이 복학을 할 시기였다. 나를 제외한다면 가장 먼저 복학을 한 79학번은 흥술이였다.
흥술이는 2학년일 때에 복학을 해서 같이 다녔다. 정확히는 묻지 않았지만 풍문에 의하면 흥술이는 사시공부를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흥술이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녀서인지 솔직담백해서 좋았다. 흥술이는 좋고 나쁜 것에 대해 거리낌 없이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복학을 하면서도 바로 나에게 ‘영주 형’ 혹은 ‘헹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아이들이 경희대 대학원에 진학을 목표로 삼을 적에 흥술이는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가 목표였다.
흥술이는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도 잘 어울렸다. 국문과 행사에 빠질 때가 없었으며 술도 잘 마셨다. 한 때, 장학금을 놓고 흥술이와 서로 경쟁을 많이 했었다. 학과 학년에서 1등을 하면 전액을 받을 수 있고, 2등을 하면 과반이 조금 넘는 액수여서 이왕이면 서로 1등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선의의 경쟁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현대문학 분야에서는 흥술이가 나보다 월등히 잘 했다. 나는 고전문학을 좋아해서 그쪽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했지만 시나 평론 분야에서는 내가 흥술이에게 훨씬 밀렸다.
흥술이는 고집도 세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것이 공부에 관한 것이든 사적인 일에 관한 것이든 자기가 주장한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가끔은 문학 분야의 해석에 관한 것으로 나하고도 부딪쳤지만 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접지 못했었다. 가끔은 그런 논쟁이 술자리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흥술이가 3학년 겨울 방학 내 생일 때에 혼자서 우리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늦게서야 대학시험을 치는 막내아우를 데리고 청주로 대전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린 한 사흘쯤 돌아다녔을 거였다. 아우와 함께 집에 돌아왔더니 흥술이가 우리 시골에 왔다가 나를 보지도 못하고 그냥 갔다고 해서 고맙고 미안했다.
흥술이는 붙임성이 좋아서 내가 없어도 하루 집에서 자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머님 힘 드신다고 물을 길러다주고 했다는 거였다. 아마 나 같으면 없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터덜터덜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느 날 내가 흥술이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한 번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흥술이와 순희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커플이었다. 순희가 늘 나이 든 우리들에게 잘 해줘서 흥술이가 질투의 눈길을 보냈지만 내가 그거까지 간섭할 일은 아니었고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국문과 여학생 중에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순희를 아프게 한 것이 나를 열 받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시골 아이들이 길가의 개똥참외를 맡아 놓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나는 같은 과의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이 중간에 가로채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강의시간에 보니까 그 여학생과 흥술이가 동시에 결강을 한 거였다. 난 애정문제에는 무척 둔했지만 순간적으로 둘이 같이 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희에게 흥술이가 왜 결강했는지 물었더니 순희도 모른다고 해서 더욱 심증을 굳혔다.
그 다음날인가 흥술이를 술집으로 불러서 왜 결강했는지를 슬쩍 물었더니 흥술이는 대충 얼버무리며 얘기를 피하려고 했다. 내가 술이 좀 취했었지만 정색을 하고 ‘너 누구랑 같이 있었지?’ 물었더니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거였다. 내가 그럼 그 여학생 불러다가 확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흥술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같이 있었다고 했다. 경복궁인가에 같이 갔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흥술이에게 화를 냈고, 옆에 있지도 않은 그 여학생을 많이 욕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흥술이나 그 여학생이나 서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둘이 좋아서 같이 있었다는 것을 남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얼마나 열 받을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 시절에 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꼭 그 일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 여학생이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해버렸다.
내가 국문과 학생들에게 미안한 일이 한두 건이 아니지만 이 일도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내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나는 그 여학생을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흥술이도 참 무던한 친구였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여자 문제까지 일일이 간섭하던 나를 그래도 형이라고 대접을 하고 지냈으니 말이다.
흥술이는 순희와 결혼하였다. 나는 두 사람의 결혼을 누구보다도 더 흐뭇하게 생각했다. 흥술이가 순희 때문에 나를 질투한 적이 있다는 생각은 가끔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든 오해였든 문젯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늘 터놓고 지냈기 때문에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순희가 혹 속으로 나를 좋아했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내게 순희는 친 동기간 같은 후배였다.
흥술이가 순희가 결혼한 뒤에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가끔 전화 통화만 했을 뿐이었다. 흥술이는 자기가 목표한대로 서울대 국문과대학원에 가서 석사와 박사를 받고서 서울여대 교수가 되었다. 나는 흥술이가 경희대교수가 아닌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진심으로 축하했다. 흥술이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교수가 될 만한 충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흥술이와 순희가 다슬이를 낳기 전에 어느 가을날 우린 종로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대희, 수명이, 선일이와 나, 흥술이 순희부부였다. 우리는 처음에 소주를 마셨고 2차에 코지호프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거기서 이미 여섯이 다 많이 취했었다. 늦었다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더니 흥술이가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해서 우린 3차까지 갔다.
다음 날 순희가 내게 전화를 했다. 어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거였다. 내가 순희에게 1차, 2차, 3차에 간 집을 차례로 얘기했더니 순희는 3차로 간 집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그 집의 위치만 대충 기억이 나고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그 집을 물었더니 아무도 3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나는 3차를 간 것까지는 분명히 생각이 났지만 다들 나보다 더 취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설명한대로 순희가 찾아갔더니 그런 집이 거기 없더라고 했다.
흥술이와 순희는 끝내 그 집을 찾지 못했고 카드와 주민증을 다 갱신했다고 들었다.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이 그림처럼 떠 있다
-윤동주, 「어느 날 오후 풍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