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9:3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82학년도 2학기에 낯선 얼굴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듣는 강의는 꼭 따라다니면서 들었지만 맨 뒤에 그것도 항상 조금 늦게 와서 앉았다가는 끝나면 말없이 사라졌다. 그러기를 한 달여 하다가 누군지 궁금해서 내가 찾아가서 물었다. 그랬더니 78학번 복학생이라고 했다. 그 얼굴이 수명이였다.
처음 본 얼굴이고 78학번이라면 나보다 한 학번 위여서 내가 늘 존댓말을 썼더니 그 사람도 우리에게 늘 존댓말을 썼다. 술자리에 같이 가서도 우리는 어색한 존댓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수명이 탓이다. 자기가 학번이 위니까 먼저 말을 놓자고 했으면 간단한 것을 그냥 늘 그 타령이니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다 지나가고 12월 24일에 명동에서 만나 말을 놓기로 했다. 만나는 날 바로 해도 될 일을 한 한기가 걸려서 된 거였다.
수명이는 군대에 간다고 송별회를 세 번이나 했다고 들었다. 군에 간다고 해서 송별회를 해주면 술 잘 마시고 갔다가 며칠 뒤에 다시 학교에 나와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다니다가 또 군에 간다고 해서 송별회를 해줬더니 술 마시고 들어가서는 며칠 뒤에 또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수명이는 볼수록 정말 개갈 안 나기가 꼭 오서산 아래 산 비탈의 논두렁 같았다.
국문과에서는 보기 드믄 충청도이고 홍성에서 멀지 않은 천안이 고향이라는 것이 나와 수명이를 끈끈히 이어주었다. 말도 별로 없고 술잔만 계속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나는 늘 답답하고 갑갑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수명이의 진정한 매력일지도 몰랐다. 수명이는 말만 느린 것이 아니라 행동도 느렸다. 언제 약속시간 한 번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늦게 와서는 그냥 허허 웃고 앉아서 술잔만 열심히 기울였다.
84년도 어버이날, 우리 선생님 강의가 6교시에 있었을 때에 내가 그 강의를 휴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 오전부터 복학생들과 술을 마시다보니 낮에 이미 취했다. 그 자리에는 84년에 복학한 79학번 몇 학생과 수명이와 내가 있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서 강의를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이 ‘어버이날’이라는 핑계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술집에 있으라고 하고서 나는 카네이션 한 송이를 사들고 강의실로 갔다. 막 강의가 시작될 참이었다. 나는 얼른 앞으로 가서 선생님께 꽃을 드리고 오늘이 어버이날인데 우리가 어떻게 선생님이 강의하시는 것을 그냥 앉아서 들을 수 있겠냐고 말씀드렸다.
나는 지금 학교 아래에 자리를 잡아 놓았으니 선생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는 빨리 일어나서 선생님 모시고 같이 가자고 했다. 선생님께서도 못 이기는 체하시면서 같이 나오셨고 애들은 다 좋아라 하면서 바로 술집으로 몰려갔다.
우리가 술을 마시고 놀다가 벽을 쳐서 이웃집 벽에 걸린 대형거울이 깨졌다. 그것을 나더러 물어 달라 하길래 나는 물을 수 없다고 버텨서 파출소까지 갔었다. 파출소에서는 얘기를 듣고는 나더러 그냥 가보라고 했다.
이날 평소에 내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숙희가 술에 잔뜩 취해 수명이를 좋아한다고 난리를 쳤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 어떻게 행동을 했길래 저런 애가 너를 좋아한다고 이 난리냐고 뎁다 수명이를 야단쳤다.
수명이는 어린 숙희가 술에 취해 그러는 것이 안쓰러워 걱정일 때에 내가 소리소리 지르니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고 숙희는 이 일로 인해 나에게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나중에는 나도 많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명이는 천안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신 선생과 중매로 결혼했다. 우리는 그때 많이 몰려가서 축하를 했다. 신혼 초에 수명이가 집에서 목욕탕에 갔다가 반지를 잃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처가에서 알까봐 신 선생이 몰래 똑 같은 것을 다시 사주었다고 들었다.
수명이가 상일고에 근무할 때, 어느 날 종로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홍금보와 둘이 나가서 수명이를 만나 세운상가 앞 감미옥에서 소주를 여섯 병쯤 마셨다. 그때는 소주의 25도였다.
나는 많이 힘들어서 일어나자고 했더니 수명이는 밖에 나와서는 또 한 잔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세 병을 더 마셨다. 그러고는 수명이와 금보 둘이 택시를 타고 같이 갔고 나는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와서 열한 시가 넘은 시간에 나는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 수명이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직 안 들어왔다고 했다. 시간으로 볼 때 충분히 갈 시간이라 놀라서 금보네 집에 전화를 하니까 금보 얘기가 택시에서 내려서 둘이 조금 더 마시고 들어갔다면서 곧 들어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조금 더 있다가 열두 시가 다된 시간에 내가 다시 수명이네 집에 전화를 했다. 수명이는 그때까지도 안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수명이가 무슨 사고를 당한 것 같아 정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걱정스러워 하니까 수명이 동생이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오빠는 늦을 때가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잠이 안 않았다.
아침 다섯 시에 내가 수명이네로 전화를 하니까 수명이는 그때도 안 들어왔다고 했다. 너무 놀랐지만 나는 학교에 나가야 돼서 학교로 갔다. 학교에서 다시 수명이네로 전화를 했더니 수명이가 다섯 시 반쯤 집에 들어와 학교에 출근했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러면서 많이 궁금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수명이를 만나서 들으니 수명이는 집에 가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길가의 벤치에 좀 누워 있다가 간다는 것이 잠이 들었다고 했다. 조금만 쉰다고 누웠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어떤 못된 녀석이 수명이의 반지와 시계를 다 빼 가 버렸다. 세상에……, 그 반지가 두 번째 반지인데 또 잃어버린 거였다.
수명이는 그래도 천하태평이었다. ‘괜찮어, 괜찮어’ 만 연발하고 나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었다. 내가 나중에 값이 싼 시계를 수명이에게 선물했다. 학교에 다니려면 시간이 생명인데 그러잖아도 늘 늦는 사람이 시계가 없으면 더 지각할 것 같아서였다. 수명이는 그렇게 당하고서도 만나면 술집부터 찾았다.
충청도 사람들이 물러터진 거야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그 중 심한 것이 수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충청도이긴 하지만 수명이를 보면 내가 갑갑할 정도였다. 나는 신 선생은 천안에 있고 수명이는 서울에서 있어서 늘 주말부부인 것이 걱정이었으나 수명이가 천안으로 내려가서 한 시름 놓았다. 수명이 개갈 안 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향에서 그러니 그나마 다행이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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