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9:3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자주꽃 핀 것은 / 자주 감자 / 파보나마나 / 자주 감자
대희는 국문과 82학번 중에서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희는 정선 아우라지 골짜기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적부터 학교를 다니다가 일찍 졸업하고 대전 큰 아버지 댁에 가서 1년 더 공부하여 당시에 대전중학교를 시험 쳐서 합격했다. 그때에 대전중학교는 수재나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희는 대전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희는 양정고를 졸업한 뒤에 인덕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다녀와서 다시 성균관대 기계과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경희대 국문과에 82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희는 나이도 다른 57년생 닭띠보다 한 살 위나 다름없었다. 음력으로 정월 초이틀이 생일이니 이틀만 빨리 태어났더라면 56년생 원숭이띠가 될 뻔했다. 나하고는 거의 열한달이나 차이가 나서 늘 자기가 형님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만약에 정식으로 계산한다면 75학번이니 나이나 학번 가지고는 대희를 당할 사람이 없을 게다.
대희의 처음 인상은 좀 말라가지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희는 어디에 가든 잘 나서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것이 세련된 서울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손해를 보는 일은 잘 하지 않으려했다. 이것이 가끔 나와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누구이든 술자리를 자주 하다보면 본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지나면서 보니까 대희는 정도 많고 남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아는 따뜻한 친구였다. 나는 장위동 대희네 집에도 자주 놀러 갔었다. 대희는 장위동에 부모님께서 마련해준 집에서 두 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 숙희는 빼어난 미인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막내 원희는 외대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숙희는 오빠 친구들에게 아주 친절히 대했다. 사실 우리가 놀러 가면 어질러 놓기나 할 뿐인데도 잘 챙겨줘서 좋았다. 숙희가 결혼할 때 대희가 당일에 전화를 해서 못 간 것이 늘 미안한 일이었다.
대희는 내가 놀러 가면 가끔 감자전을 부쳤다. 난 솔직히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지만 나를 위해서 감자를 깎고 갈아서 전을 부치는 대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가 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희가 부친 것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우리 충청도에서는 감자전을 부쳐 먹는 집이 거의 없을 때라 대희가 부쳐 준 것이 처음 먹는 맛이었다. 그런대도 아주 맛이 좋아서 나는 늘 대희가 부친 감자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이 있다고 단언했다.
대희는 공부를 잘 했다. 나처럼 소문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티를 안 내고 잘 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희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실제로 대희는 1학년을 마치고 올라갈 적에 국문과 1등으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인지 다른 여학생이 받았다. 이 문제로 ‘다모아’에서 홍명규 조교와 술을 마시다가 주먹질을 한 일은 두고두고 우리 입에 오르내렸다.
대희는 술도 잘 마셨고 노래도 잘 했다. 선일이처럼 가수 수준은 아니었어도 어딜 가나 빼어난 노래 실력을 발휘했다. 기타도 잘 치고 사진기를 다루는 솜씨도 좋았다. 그 당시에는 사진기가 흔한 것이 아니었지만 대희는 손때 묻은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기를 하나 가진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되는 줄 알던 시기이다. 대희는 그 사진기로 우리 국문과 행사 때면 사진을 잘 찍어서 나눠주곤 했었다.
대희는 어머니가 중매를 하셔서 대학 3학년 때에 결혼식을 올렸다. 여량에서 가까운 나전병원에 근무하던 아가씨를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시어 소개하셨고 인연이 되어 그 아가씨와 결혼한 거였다.
대희가 결혼하기 전에 남희 씨가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선일이, 수명이와 대희, 남희 씨하고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랐었고, 대희와 남희 씨. 그리고 나와 정숙이 넷이서 소양댐으로 바람을 쏘이러 가기도 했었다. 이 일이 내가 정숙이와 결혼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희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들에 관해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좋아하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다르다고 하면서 이것, 저것 트집을 잡았다. 대희 때문에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내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마치 내가 선일이에게 한 것처럼 까다롭게 참견을 했었다. 그리고 늘 결론은 나와 결혼한 정숙이였다.
나는 대희 고향인 여량에 두 번 갔었다. 한 번은 대희 결혼식 때이고, 다른 한 번은 4학년 방학 때였다. 대희가 결혼할 때에 우리 국문과에서 여러 명이 정선으로 갔다. 청량리역에서 밤 열한 시인가에 기차를 타고 여량에서 새벽 네 시에 내렸다.
대희가 마중을 나와서 우리는 대희네 집으로 갔다. 대희네는 거기서 ‘옥산장’이라고 하는 널리 알려진 여관을 하고 있었다(대희 어머님과 옥산장은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상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신혼부부와 함께 서울로 왔다. 거기서는 신혼여행을 가기가 어려운 문제여서 대희부부는 서울에 와서 하루 자고 떠났던 거다. 그런 여러 일들로 해서 나는 남희 씨하고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정숙이도 은경이도 남희 씨를 잘 따랐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는 쉬운 일이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수명이하고 둘이서 여량으로 갔다. 대희가 방학 중에 놀러 오라고 해서 시간을 냈던 거였다. 대희는 방학 기간에 남희 씨하고 본가에 가서 지내고 있었다. 그때 가서 보니 정선 지역은 밭이 다 옥수수였다.
어딜 가나 옥수수 밭이었다. 우리가 밥을 먹고 나면 옥수수와 감자 삶은 것이 한 바구니 들어왔다. 나는 감자는 안 먹고 지냈던 터라 거기서도 감자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하나만 먹어보라는 대희 말을 듣고 마지못해 하나를 들었더니 그런 맛은 처음이었다. 감자를 살짝 쪼개면 그 속에 이슬이 맺힌 것처럼 포슬포슬한 것이 손을 놓지 못하게 했다.
아우라지에는 줄로 끄는 배가 있었다. 수명이와 그 배를 타고 건너다가 내가 어깨를 쇠줄에 부딪쳐 큰 상처가 났지만 너무 즐거워서 아픈 것도 잊은 채 돌아다녔다.
나이가 들어서 친구를 만나 사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늦은 나이에 복학하여 좋은 친구를 셋이나 건졌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얀꽃 핀 것은 / 하얀 감자 / 파보나마나 /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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