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당신

2012. 3. 27. 19:25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우리 늦은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좋아했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다섯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한 여자를 같이 만나는 다섯이 좋아했다는 것은 흔한 얘기가 아니다. 그 사람이 미혜 씨다.

 

대학에 복학을 해보니 같이 국문과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78명이나 되었다. 이 숫자는 당시 고등학교의 한 학급 정원 60명보다도 더 많은 거였다. 그래서 같은 과에 다녀도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에서는 대희가 애들하고 잘 통하고 여학생들하고도 잘 통했다. 나는 대학에 복학했을 때까지는 여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가 말을 걸어오면 무척 어색해했었다.

 

2학기가 되었을 적에 대희가 우리 과의 어느 여학생 얘기를 하면서 그 여자도 나이가 우리와 같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어 근무하다가 늦게 대학에 왔다면서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하자고 했다. 솔직히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또 보았다 해도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 보게 된 여자가 미혜 씨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자였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내 머리 속에 조선시대의 여인상으로 각인이 되었다. 처음에 몇이 만나 인사를 하고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대희가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첫 인상이 좋아서인지 그녀는 만날수록 관심이 갔다.

 

술을 마시러 가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불러서 함께 했다. 나는 말이 많은 여자보다 말이 적은 여자를 좋아하고 활달한 성격보다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 술을 마실 줄 안다고 남자 앞에서 잔을 막 받는 여자보다는 얌전하게 조심해서 마시는 여자가 더 좋다. 그러니까 다소곳한 여자를 좋아한다.

 

아마 이런 면에서 미혜 씨가 내 마음에 들었을 거였다. 미혜 씨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건강이 안 좋다고 했지만 그 사양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어디 가서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자랑이 아니요, 마시지 못한다고 빼는 것도 자랑이 아니지만 그 태도를 어떻게 갖느냐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술 먹고 흐트러진 여자의 모습이다.

 

2학기 중간에 미혜 씨가 한 잔을 사겠다고 해서 대희와 선일이, 수명이와 함께 빈대떡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어떤 곳으로 가도 좋다고 얘기했지만 여자에게 부담이 되는 비싼 안주가 있는 집은 피하고 싶었고, 학교에 오갈 때마다 늘 대문이 열려 안이 보이는 한옥에 빈대떡이라고 써 붙인 집을 봐왔던 터라 그리로 갔다.

 

기분 좋게 마시고 같이 지하철을 탔다. 마침 빈자리가 많아서 둘이 나란히 앉았다. 미혜 씨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쳐다봤더니 자기는 몸이 안 좋아서 곧 휴학을 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 잘 해줘서 우리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작별인사로 술을 샀다는 거였다. 아니 이게 무슨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인가…….

 

나는 너무 놀랐다. 이제 막 정이 들고 흠모하는 감정을 갖고 있는데 휴학이라니……. 나는 너무도 놀라서 다른 사람들이 다 듣는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그것은 절대 안 된다고 얘기했다. 술도 좀 취했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얘기여서 그랬다.

 

내가 좋아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우리가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휴학을 하느냐고 학교만 나오면 무엇이든 다 해줄 테니 휴학만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부탁한 것이 먹힌 것인지는 모르지만 미혜 씨는 며칠만 쉬고는 다시 나와 1학년을 마쳤다.

 

겨울방학이 돼서 집으로 내려가 있을 때에 우리 국문과 학생들에게 편지를 많이 보냈다. 다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지낸 사람에게는 보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미혜 씨에게서 답장이 왔다.

 

솔직히 연서(戀書)도 아니고 그저 간단한 안부편지였지만 내가 흠모하는 여자에게서 답장이 왔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내가 왜 흠모라고 하느냐면 미혜 씨는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고 여러 모로 볼 때 나보다는 한 수 위라고 생각해서 가까이 하기엔 거리가 먼 사람이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혜 씨는 2학년 때에 기어이 휴학을 했다. 정말 건강이 안 좋아서 학교에 다닐 수가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송별연을 수락산에 가서 했다. 우리 늦은 남학생들하고 우릴 잘 따르는 여자 후배들하고 같이 가서 진달래 핀 냇가에서 밥을 지어 먹고 놀다가 왔다. 그 뒤로는 가끔 연락만 듣고 자주 보기는 어려웠다.

 

나중에 들으니 대희하고 둘이 웬만큼 만나고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다. 대희는 결혼까지 생각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의 사주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집에서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그냥 좋아했던 친구로 남게 되었다.

 

내가 심심하면 대희에게 하는 얘기가 이 자식아, 결혼도 못할 거라면 진작 물러나서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어야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만들었냐?”이고, 대희의 대답은 임마, 그게 아니야. 나 정말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이다.

 

이미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다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니 지금 이런 얘기를 웃으며 해도 괜찮을 것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결혼은 연분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희도 그렇지만 미혜 씨도 서로 결혼할 사람으로 생각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만난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 중에 가장 우스운 것은 다들 미혜 씨를 좋아했다고 얘기하는 거다. 그게 짝사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장난인지는 정확하게 구분이 안서지만 같이 만나는 우리 다섯은 다 미혜 씨를 어느 정도 좋아하고 사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를 싫어하는 내가 비를 좋아해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도 다 그 여자가 비를 좋아한다 해서이다. 우리가 지금도 미혜 씨를 좋아한다는 것은 안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이미 오래 된 이야기이고 다들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면서 살고 있으니 새삼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 다섯에게서 사랑을 받았으면 미혜 씨는 만인의 연인이라고 하기에 족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마종기, 꿈꾸는 당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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