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2012. 3. 27. 19:3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자목련이 흔들린다. / 바람이 왔나보다. / 바람이 왔기에

 

내가 선일이를 처음 만난 것은 복학하고서 일주일 쯤 뒤다. 교련시간이 있어서 예비 군복을 입고 강의실로 갔더니 전역한 사람은 교련 교육을 받지 않고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고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매우 홀가분한 기분으로 나왔더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셋이나 더 있었다. 정식이 형, 선일이, 대희였다. 우리는 그날 그 시간에 넷이 통성명을 하고 서로를 알게 되었다.

 

선일이는 좀 특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대학에 들어왔다고 했다. 빤질빤질한 것이 서울 사람 같았지만 같이 얘기를 해보니 의외로 순박한 면도 있어서 나는 대번에 가까워졌다.

 

선일이와 대희는 주로 재수하여 들어 온 아이들과 당구를 치러 많이 다녔다. 선일이는 당시에 300을 놓는 제법 고수였다. 말만 300이지 200인 대희에게 눌릴 때가 많았다. 난 그때 늘 선일이가 이기기를 바랐다. 200을 놓고도 자주 이기는 대희가 좀 괘씸해서였다.

 

나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촌티가 줄줄 흐르는 갓 상경한 촌놈이었다. 서울에 와서 1년 재수하고 군에 갔다가 전역해서 바로 복학했으니 서울 생활은 재수시절 1년밖에 없는 순 생짜였다. 선일이는 이런 촌사람을 어수룩하다고 놀려 먹지 않고 아주 친절하게 대해줬다.

 

내가 어떤 때는 쉬는 날에 석관동으로 놀러 가서 선일이 친구들하고도 같이 어울렸다. 선일이 친구들도 모두 괜찮았다. 서울에서 그 나이면 다 대학에 다니는 줄 알고 있었지만 선일이 친구들은 한 친구만 대학에 늦게 다니고 있었고 다 동네 건달이었다.

 

말이 건달이지 노는 것은 아주 점잖았다. 채근이. 용관이, 수철이를 비롯해서 여러 친구들과 가끔 어울려봤지만 동네에서 노는 친구치고는 순수하고 점잖아서 좋았다. 나는 그 친구들하고 당구장에도 많이 가서 구경했고 술자리도 같이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선일이가 바탕이 좋아서 친구들도 다 그러려니 생각했다.

 

선일이는 한 마디로 멋쟁이였다. 옷도 세련되게 입었고 노래도 잘 하고 기타도 잘 쳤다. 국문과에서 노래를 잘 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여럿이 있지만 단연 선두에 놓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여자를 좋아해서 늘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 선일이는 그야말로 로맨티스트였다. 선일이는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였으나 가정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노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조선시대 한량이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선일이네 집에도 자주 놀러 가곤 했었다. 한 번은 쉬는 날 놀러갔더니 선일이가 태릉 푸른 동산에 놀러가자고 했다. 나는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 기꺼이 따라 나섰다. 동네 친구 셋하고 해서 다섯이 갔는데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고 울타리를 넘자고 했다.

 

솔직히 나는 장난인 줄 알았었다. 어디 애들도 아니고 스물대여섯이나 먹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겠나 싶었더니 정말 태릉으로 들어가서는 담장을 뛰어넘어 푸른 동산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그렇다고 나만 안 들어갈 수도 없어서 나도 얼결에 담장을 넘었다.

 

1학년 때에 이미 선일이 아내가 배가 불렀다. 나중에 아이 이름이 상미여서 상미엄마라고 불렀지만 그때는 혜련 씨였었다. 선일이가 가장인 셈이었으나 학생이라서 생활비는 부모님께 타다 썼다.

 

선일이는 세련된 매너로 어딜 가나 인기가 좋았다. 특히 그 노래 솜씨에 안 넘어가는 여자들이 없었다. 총각이었다면 그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미 가정을 가졌고 곧 애 아버지가 될 사람이 그러고 다니는 것이 나는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상미엄마는 선일이 친구들에게 무척 친절히 대했다. 어른들이 안 계시기 때문에 가끔 거기서 모여 놀다가 저녁 신세를 질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상미엄마가 회덮밥을 잘 해줘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상미엄마는 내가 시골에서 왔다고 특히 더 신경을 써 줘서 나는 늘 고마워했다.

 

한 번은 선일이가 일본에서 들어 온 교포아가씨와 눈이 맞아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내가 알면 간섭을 하고 잔소리를 하니까 나만 모르게 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내가 알게 된 것이었다, 선일이는 내게 감추려 했지만 나는 풍문으로 들어서 선일이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였다. 선일이가 내게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고자이마스’, ‘소오데스네따위의 왜말을 하고 다녀서 더 꼴 보기가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강의가 남아 있는데도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 선일이가 내 눈에 띠었다. 그래서 나도 조용히 일어나서 내 가방은 수명이에게 주고 뒤를 따라 나갔다. 선일이는 내가 따라오는 것을 눈치 채고 이리저리 골목을 바꿔가며 위장전술을 쓰더니 시간에 쫒기니까 결국은 내게 와서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생긴 년인지 봐야겠다고 절대 혼자는 못 들어간다고 우겨서 선일이가 어쩌지를 못하고 같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종로 어디서 만났던 것 같다.

 

내가 따라 나와서 그 아가씨도 당황스러워 했지만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엔 상미엄마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 여자가 내 말을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간에 나는 선일이에게 정신 차리라고 막 퍼부어 댔다. 선일이가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내가 그런 눈치를 볼 리가 없었다.

 

내가 선일이이게 강의까지 빼 먹으면서 여자를 만나러 다녀야 하냐는 것과 집에서 살림하는 상미엄마를 생각하라는 얘기를 떠들어댔으니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다행히 얼마 뒤에 그 여자가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선일이와 학회장에 같이 출마한 것 때문에 많이 미안했지만 그때는 내가 생각한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면서도 선일이가 국문과 학회장이 되었더라면 여러 여자 눈물 흘리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오히려 안 된 것이 상미엄마에게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선일이는 멋을 아는 친구였다. 멋을 안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진정한 멋쟁이는 흔치 않았다. 선일이야말로 회기동의 멋쟁이, 멋진 로맨티스트였다. 앞으로 경희대 국문과에서 이런 로맨티스트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선일이를 늘 석관동 대추나무집 둘째 아들이라고 불렀다. 집 뒤뜰에 대추나무 여러 그루가 있어서 그랬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석관동에 갈 기회가 없었다. 아마 거기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자목련이 흔들리는가 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김춘수, 바 람에서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나무 숲  (0) 2012.03.27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2012.03.27
자주 감자  (0) 2012.03.27
풀 꽃  (0) 2012.03.27
어느 날 오후 풍경  (0) 2012.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