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2012. 3. 27. 19:45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광혜원 이월 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우리 선생님은 경희대학교에서 도서관장, 학생처장, 교육대학원장의 보직을 역임하셨다. 총장이 임면하는 것이 아니고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는 교수협의회의 초대 의장을 맡기도 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선생님은 그런 자리가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다고 생각한다. 그저 강단에 서서 학생들과 편하게 어울리시는 일이 선생님의 가장 좋은 모습이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선생님께서 보직을 맡으셨기 때문에 관장실이나 처장실에 가볼 기회가 없었지만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돼서 교육대학원장실에는 자주 드나들었다.

 

1988년 여름에 교육대학원 조교로 있던 84학번 석만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석만이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 졸업 뒤에도 가끔 통화를 했었다. 석만이는 전화로 나를 확인하고서는 바로 선생님을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선생님 말씀이 나를 놀라게 만드셨다. 나더러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솔직히 교육대학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다시 석만이를 바꿔 주셨다.

 

석만이는 자기가 이미 내 원서를 접수해놨으니 사진 두 장하고 접수비를 가지고 교육대학원에 들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접수를 해 놓았으니 시간이 안 나면 시험 보러 오는 당일에 내도 괜찮다고 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된 거였다. 나는 학과시험을 치르긴 했지만 면접은 보지 않고 들어갔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 재직하면서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들처럼 할 수 있을 줄로 알고 대학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지만 학교에 가보니 그것은 나 같은 신임교사는 꿈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이 주당 스무 시간이 넘는데 무슨 수로 하루를 빼서 대학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신임교사에게 그런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학교는 극히 드물었다. 내가 경희중고교에 가 있다면 그래도 틈틈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등촌동에서 회기동까지는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 불가능했다. 사실 그런 욕심 때문에 나는 경희고등학교로 갈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가지셨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나더러 가능하다면 박사학위까지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지만 내 형편이 그럴 욕심을 내기가 어려웠다.

 

일반대학원은 주간에 다녀야하기 때문에 어렵지만 교육대학원은 야간에 다니기 때문에 자신만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교육대학원은 저녁 여섯 시에 강의가 시작되고 아홉 시 반에 끝이 났다. 두 학기는 교육학강의가 있어서 한 주에 이틀을 나갔지만 두 학기는 국문학 강의만 있어서 하루만 나가면 됐다.

 

나는 교육대학원에 들어가면서 경희대 국문과 서 교수님을 만날까 무척 걱정을 했지만 그분께서는 교육대학원 강의를 나시지 않으셨다. 나는 현직교사이고 모교출신이라 학비도 30%나 할인이 되어서 그것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에는 나를 포함해서 현직 교사가 셋이었고 교직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생들이 여남은 있었다. 대부분 국문과 후배들이었지만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만나서 놀랍게 생각했던 후배가 성희다. 성희는 국문과 후배로 교육대학원생중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늘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는 일에만 앞장을 섰던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성희에게는 미안할 때가 많았다. 성희는 아버지가 경희대 국문과를 나오셔서 경희고등학교에 재직하시는 바람에 그것이 늘 얘깃거리가 돼서 대학시절을 힘들게 보냈다고 들었다. 성희는 자기보다 1년인가 후배인 연희하고 어울려 늘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드느라 애를 썼다.

 

나중에 성희는 내가 있는 학교 근처의 진명여고로 와서 임용이 되어 가끔 보고 있고 연희는 정릉 어디 학교에 임용이 되어 나가고 있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후배들이 보여줘서 무척 흐뭇했다.

 

그때 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박 선생님이 나보다 한 참 위였고 파주공고에 근무하는 이 선생이 조금 아래였다. 박 선생님은 홍성 분으로 나하고 무척 친하게 지냈다. 박 선생님은 서울사대부중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교감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석사학위가 필요했을 거였다. 박 선생님은 술도 잘 샀고 한참 아래 애들하고도 잘 어울려줘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놀란 것이 그 분은 자기반 아이들 학부모 전화번호를 다 적어가지고 다닌다는 거였다. 나는 지금도 학부모 전화번호는 고사하고 반장 핸드폰도 모르는 교사라 그게 조금 이상했었다.

 

파주공고 이 선생은 강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온 사람으로 그가 있는 학교 재단이 전문대학을 세운다고 공부를 더 하라고 해서 다닌다고 들었다.

 

우리는 교육학강의가 끝나면 바로 집에 갔지만 국문학강의가 있는 날은 끝나고서 꼭 술집으로 내려갔다. 내가 대학교 시절에 많이 다녔던 도림이나 회기시장에 있는 순대국집이었다. 여학생들은 그냥 집으로 갈 때가 많았지만 남자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꼭 들렀다가 갔다. 그때 술값을 낼만한 사람은 나하고 박 선생님, 이 선생 셋뿐이었다.

 

아무래도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야지 어린 학생들에게 술값을 걷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회사에 다니는 영희가 들어와서 많이 보탰지만 그 친구와 같이 다닌 것은 한 학기뿐이었다. 나는 서울여대를 졸업하고 온 영희하고 아주 가깝게 지냈다. 처음에 나하고 같이 시험을 쳤다가 안 되더니 나보다 두 학기 늦게 들어왔다. 무슨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술값을 낼 때에 늘 앞에 섰다.

 

내가 여자에게 술값을 신세진 것은 아마 영희가 유일할 거다. 영희는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여 사진기도 사고 같이 촬영도 다녔지만 내가 졸업한 뒤에 소식이 끊겼다. 나중에 들으니 경기도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안산 어느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아 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고 은,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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