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질 때

2012. 3. 27. 19:4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는 사은회를 서울관광호텔에서 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 막걸리로 교무실에서 사은회를 해보고는 중학교 때는 사은회가 있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때는 사은회를 못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는 제법 번듯한 곳에서 사은회를 하고 싶었다.

 

198511월에 나는 사은회에 관한 얘기를 선일이와 주고받으면서 졸업을 하는 마당이니 그동안 가르쳐주신 교수님들께 조촐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곳에서 하자고 했다. 늘 돈이 문제지만 정말 대학을 졸업하는 마당이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님들을 멋진 곳으로 모셨으면 싶었다.

 

의대나 법대 등은 사은회를 특급 호텔에서 휘황찬란하게 한다지만 우리 국문과는 그런 호화판은 꿈도 못 꾸었다. 그렇다 해도 사은회만큼은 남 보기에 너무 초라하지 않은 곳에서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선일이가 종로 2가 농협빌딩 부근의 서울관광호텔로 가자고 해서 가보았더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는 거기로 예약을 해놓고 국문과 4학년 학생들에게 알렸다. 교수님 선물비까지 해서 25,000원 정도를 걷었다. 그 액수가 적은 돈은 아니어서 여기저기 불만도 있었지만 선일이가 잘 다독거려 거의가 다 참석하겠다고 했다. 우린 교수님들 선물은 명동에 나가서 금강제화 상품권을 샀고, 우리 지도교수이신 선생님께는 거기서 특별히 고급 가죽가방을 하나 더 샀다.

 

선일이가 과대표라서 학과에 대한 대부분은 나이 든 우리끼리 먼저 상의하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면서 시행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비싼 곳으로 가면 못 오는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의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는 그냥 다 올 거라고 말씀드리고 추진했었다. 좋든 싫든 대학에서의 마지막 행사인 셈이니 오면 좋고 안 오면 말고였다. 나는 졸업여행에서의 실망감 때문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일을 추진하는 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만 왔으면 하고 바랐다.

 

사은회 당일 날, 나는 국문과에 입학한 후 두 번째로 양복을 입고 학교에 나갔다. 내가 학회장을 하면서 후임 학회장선거를 할 적에 처음 입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지만 늘 점퍼만 입고 다니다가 갑자기 양복을 입으니 가게 아줌마가 정말 몰라볼 뻔했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안 입고 다녔다고 놀리셨다. 나는 아직 취업전이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의 마지막 행사라서 멋을 내 본 거였다.

 

교수님들께 미리 다 연락을 드렸고 오신다는 말씀까지 다 확인이 된 상태였다. 시간이 되자 노강 선생님, 황순원 선생님, 서정범 선생님, 김태곤 선생님, 금봉 선생님, 최동호 선생님이 오셨다. 국문과 교수님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같이 자리를 한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우리가 학교 다니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의식 순서에 따라서 교수님들께 절을 올리고 선생님들의 격려 말씀을 들었다. 노강 선생님이 조금 길게 말씀을 하시고 나니까, 황순원 선생님이 나도 노강처럼 말을 잘 했더라면 답답하게 원고지 칸이나 메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어 다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사은회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자리로 시작되어서 아주 흐뭇하게 끝이 났다.

 

그날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순희가 가수 심연옥이 부른 아내의 노래를 부른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미 학과 커플로 소문이 난 두 사람이라 흥술이가 대학원 시험 때문에 못 온 자리에서 그 노래 제목과 가사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었다.

 

나도 노래를 시키는 바람에 혜은이의 후회를 불렀다. 황순원 선생님 말씀대로 나도 남들만큼 노래를 잘 불렀다면 그런 자리에서 말로 때우지는 않았을 것이나 타고난 음치에다가 평소에 노래 솜씨를 갈고 닦지 않은 것을 국문과 82학번 학생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말았다.

 

황순원 선생님의 평양 철도가와 우리 선생님의 찔레꽃’, ‘울고 넘는 박달재’, ‘홍도야 울지 마라등을 들으며 자리는 아주 흥겨웠다. 대희도 노래를 잘하고 선일이도 잘 해서 갈채를 받았다.

 

거기서 1차가 끝난 뒤에 교수님들은 택시로 모셨다. 그리고 선일이, 대희, 수명이, 성호, 선학이 재만이와 선생님을 모시고 경희대 앞으로 와서 빨간 손톱으로 갔다. 기분 좋게 한 잔 더하고 싶어서였다. 사실 끝나는 날이라 욕심 같아서는 은경이, 미경이, 순희, 영희와 같이 자리를 하고 싶었지만 다들 자기네와 친한 사람끼리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나 버리고 나만 남은 거였다.

 

사은회가 아주 성황리에 끝났다고 기분 좋았으나 갑자기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어서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일로 선생님께서 화를 내셨는지는 지금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날은 나도 언짢아졌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다보니 나도 갑자기 화가 팍 올랐다.

 

나는 옷을 챙겨 가지고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와 버렸다. 일이 공교롭게도 문을 열고 닫다가 문이 쾅하고 큰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그 일로 더 화가 나셨다고 들었다. 일이 묘하게 더 커진 거였다.

 

그 며칠 뒤에 나는 대학원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떨어지고는 나는 선생님을 많이 원망했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원 정원 수가 아주 적었고 국문과 합격의 칼을 쥐고 계신 분이 서 교수님이셨다. 서 교수님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은 대학원 진학이 엄청 힘이 든다고 했었.

 

솔직히 대학원에 떨어진 것은 내가 시험을 잘 보지 못한 때문이지 교수님이 나를 떨어뜨리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괜히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내가 못하고서 선생님을 원망했던 거였다.

 

선생님께서도 내가 떨어져서 속이 많이 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이왕이면 내가 합격하는 것이 더 좋으셨을 것이고 꼭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안 되었으니 여러 모로 속이 상하셨을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은회를 하던 날, 내가 선생님께 불경스럽게 대한 것이 너무 죄송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11일에 나는 모른 척하고 세배를 가서 선생님을 뵈었다. 그 뒤로 그날 있었던 일은 선생님께서도, 나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봄 한 철 /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할 때,

 

-이형기, 낙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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