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2012. 3. 27. 19:55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능수버들이 지키고 있는 낡은 우물가 /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만 대학의 수학여행은 모든 것을 과대표가 알아서 해야 했다. 능력 있는 과대표들은 여자대학이나 여자들만 다니는 학과와 조인트를 해서 가기도 한다고 들었지만 우리 국문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 중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남자들이 안 갔으면 국문과 여학생들도 남자만 있는 다른 과와 조인트를 하고 싶었을 테니 그것은 피장파장인 셈이었다.

 

국문과의 학생 숫자가 입학할 때보다는 많이 줄었다고 해도 60여 명이 넘었지만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학생은 스무 명도 채 안 되었다. 돈이 많이 드는데다가 당시 분위기가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중요한 수학여행을 안 갈 수도 없었다.

 

1984년 꽃 피는 봄 4월에 선생님을 모시고, 대희, , 일구, 성호, 선학이, 시만이, 영실이, 은경이, 미경이, 영희, 향기, 해송이, 주리, 윤숙이, 기엽이, 광혜, 승주, 남희 등 열여덟 명이 설악산을 들러서 관동팔경을 답사하는 수학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양구로 가서 설악동에서 하루 자고, 설악산에 올랐다가 삼척 죽서루, 성류굴을 보고 백암온천에서 자고 안동으로 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소양호에서 양구까지 배로 가려 했으나 물이 많이 줄어 배가 신남까지만 간다고 했다. 거기서는 다른 대안이 없어서 신남에 가서 설악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거슬러 올라가는 맛은 나도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복학생들이 준 맥주를 배 위에서 호기롭게 마시며 기분을 낸 것 까지는 좋았으나 배에 화장실이 없었다.

 

강위에서 실례를 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안 되는 일이지만 국문과 여학생들이 열 명이나 타고 있는 데서는 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는 몸을 세우고 서 있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지만 배가 선착장에 닿고도 한참을 찾아야 화장실이 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때의 그 뼈아픈 경험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동 중에는 술 마시는 일을 무척 조심한다. 선착장에서 올라갔더니 설악동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있다고 했다. 설악동으로 간다기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를 탔더니 그 버스는 인제 원통으로 해서 한계령을 넘는 것이 아니라 상남, 창천, 율촌, 미산리 등으로 해서 포장도 안 된 구룡령을 넘어가는 노선이었다.

 

그 길은 한계령을 넘는 길보다 두 배 가까이 더 시간이 걸렸다. 점심 때 조금 지나서 탄 버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양양으로 해서 설악동 입구에 도착했다. 그 버스 안내양이 친절하게 민박집을 안내해줘서 우리는 그녀가 가르쳐 준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점심도 부실했고 해서 저녁은 횟집에 간다고 했지만 나는 살짝 대희하고 둘이 빠져 나왔다.

 

내가 훈련소에서 조교로 있을 때 만났던 훈련병 기순이가 속초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내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기순이가 설악동에 오면 연락을 하라고 해서 기순이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는 내가 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처지였다.

 

나는 아직 대학 3학년 학생이었지만 기순이는 벌써 2년차 교사였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속초 바닷가 횟집촌에서 횟집을 하고 있는 기순이 학부형네로 가서 아주 잘 먹었다. 내가 훈련소에서 무척 잘 해줬다고 저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둘이 잘 먹고 다시 숙소로 와보니 어수선했다.

 

선생님께서 술이 너무 취하시어 횟집에서 이미 인사불성이 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구가 선생님을 업어서 모셔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여행을 떠나시면 늘 술을 많이 드시고 취해서 주무셨다. 그런 일이 어제 오늘이 아니기에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언제나 아침에는 선생님이 가장 먼저 일어나셔서 운동 삼아 밖으로 한 바퀴 돌고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면서 남학생들을 깨우시어 다들 일어났다. 우리는 아침을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먹고 케이블카를 타고서 권금성에 올라갔다. 거기서 생각지도 않게 황순원 선생님 사모님을 뵈었다. 사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선생님은 자주 뵌 분이라 바로 알아보셨던 거다. 사모님께서는 교회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오셨다고 했다.

 

우리는 설악산에서 내려와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삼척으로 갔다. 점심을 먹을 때에 나는 선생님께서 술을 안 드시기를 바랐지만 선생님은 그여 고량주 한 병을 혼자서 드셨다. 취기가 조금 올라오신 선생님은 술을 드시지 말라고 만류한 우리들에게 화가 나셨다.

 

우리는 죽서루에 들렀다가 울진군에 있는 성류굴로 갔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번 보셨다고 밖에 계신다고 하시더니 혼자서 막걸리를 한 잔 더 하셔서 조금 취하셨다. 굴속에서 나와 보니 선생님께서 학교에 갔다 오는 초등학생 자전거를 빌려서 애를 뒤에 태우고 좁은 길로 오시는데 어쩐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오시다가 논두렁길에서 넘어지셨다. 우리는 웃지도 못하고 울 수도 없는 일이라서 다들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 아마 이런 모습이 또 선생님을 더 화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우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오시더니, 먼저 아이에게 과자를 사 주라고 하셨다. 내가 아이를 보내고서 선생님 얼굴을 보니 화가 잔뜩 나 있으셨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시간에 쫓겨 다시 백암온천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만 바가지로 혼이 났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을 모시고 와서 제대로 모시지 않는 죄(?)를 전부 내게 쏟아 부으셨다. 나는 버스 안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연신 죄송합니다. 잘못 했습니다를 반복하며 선생님이 술이 좀 깨시기를 바랐으나 도착지에 닿을 때까지 선생님의 꾸지람은 계속 되었다. 시골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버스가 방향을 돌릴 때마다 앉은 자세에서 넘어질 까봐 의자를 붙잡으며 땀을 흘려야 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라고 하기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내가 제일 선배이니 선생님께서 내게 화풀이를 하시는 것에 대해 무어라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우린 백암온천 정류장에 내려서 민박을 구해 들어가서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은 우리와 한참을 흥겹게 노시더니 시켜 온 국밥도 거의 잡숫지 못하시고 그냥 쓰러지셔서 잠이 드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주무시는 방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 선생님께서 주무시면서 숨을 안 쉬어서였다. 지금은 나도 무호흡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터라 계속 곁에 앉아서 선생님이 숨을 안 쉬시면 선생님 몸을 붙잡고 흔들면서 선생님, 선생님을 연발했다.

 

다들 놀고 있다고 대희가 나를 부르러 왔었지만 나는 그렇게 두어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숨을 안 쉬시다가도 계속 코는 곯으셔서 조금은 마음을 놓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 겁이 많이 났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으니 나도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즐겁게 놀았다. 나는 가까운 몇을 빼고는 국문과 여학생들과 자리를 같이 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 밤은 많이 마시고 흥겹게 어울렸다.

 

아침에 보니 선생님은 아무 이상이 없으셨다. 솔직히 그때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무척 놀라웠다. 아침밥을 먹고는 거기서 안동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안동에 도착해서는 선생님께서 안동대학교에 계시는 김명희 교수님께 연락을 해서 그 분이 나오셨다. 김 교수님께서 안내해주셔서 우리는 안동댐에 가서 조금 쉬고 교수님께서 사주신 점심을 먹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김종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風景)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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