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9:51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지난 여름내 / 땡볕 불볕 놀아 / 밤에는 어둠 놀아 / 여기 새빨간 찔레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1985년 내가 4학년이 될 때에 사회 분위기와 학교, 학과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오랜 시간 군부독재에 억압되어 지내던 민심이 꿈틀대기 시작한 거였다. 밖의 분위기가 먼저인지 학교 분위기가 먼저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변화는 우리 국문과에도 오기 시작했다.
나는 국문과의 독재자로 악명이 높았지만 말이 독재자이지 내가 국문과에서 독재나 독주할 일도 없었다. 다만 분위기가 기존 권위에 대해 모두 부정하려고 하다 보니 국문과의 많은 일들에 대해 내게 책임을 지우고자 한 거였다.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참 묘한 것이어서 스포츠에서도 이 분위기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지만 내가 물러나면서 모든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나와 가깝던 후배들조차 다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주 가까웠던 서너 후배들 말고는 내가 가까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이 들만큼 나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바꾸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늘 내식대로 살아왔을 뿐 남의 견해에 휘둘릴 것이 없었다. 위로 선생님 잘 모시고 내 공부 열심히 하면 될 일이지 남의 눈치 볼 것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분위기가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실망이 컸었다. 그 당시 분위기는 학생들이 자기학과 교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고 ‘어용’이라고 몰아 부칠 때였다. 또 그런 분위기가 되다보니 학교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반대가 많았다.
4학년 2학기 마지막 과대표를 선일이가 했는데도 졸업여행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졸업여행을 안 갈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다 안 간다고 했다. 아니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졸업여행을 갈 때에 자기들은 그냥 다른 것을 하겠다는 얘기였다.
복학생들, 그러니까 나처럼 1학년 때 복학을 한 것이라 아니라 2학년 2학기 이후에 복학한 복학생들, 주로 79학번이었고 다른 학번도 있었지만 그들은 주류인 우리에게 아주 비협조적이었고 그들과 어울리는 82학번 여학생들도 대부분 그쪽으로 돌았다.
선생님께서 우리가 복학한 79학번과 같이 할 때에 그들에게 영주는 79학번이지만 76학번 대우라고 늘 말씀을 하시니 그들도 우리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나마 2학년 1학기에 복학한 흥술이와 3학년 2학기에 복학한 일구는 가깝게 지냈지만 다른 복학생들과는 영 가까워지질 않았다.
그래서 늘 소가 닭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지냈더니 그들은 우리가 선생님을 모시고 하는 국문과 행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물론 내가 평소에 82학번 여학생들하고 가까이 지내고 좀 살갑게 대했더라면 여학생들도 내 편으로 왔을지 모르지만 나는 82학번 여학생들보다 83, 84학번 여학생들과 더 가까이 지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평소에 믿고 지낸 순희, 영희, 은경이, 미경이도 다 안 간다고 하니까 나는 그들이 너무 괘씸하고 미워졌다. 우리끼리만 가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를 하겠으나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자리에 안 간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명색이 졸업여행인데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을 조사하고 설득하고 한 결과가 과대표인 선일이와 나, 대희, 수명이, 영완이, 성호, 재만이, 선학이 등 여덟 명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춘천 소양호 안쪽에 있는 청평사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 금요일이었다. 목요일 강의가 다 끝나고 나오면서 회기역 가까이에 있던 도림에 가서 술 한 잔을 했다. 늘 같이 다니는 수명이, 대희, 선일이와 함께한 자리였다. 거기에 은경이가 우리를 배웅하겠다고 따라 왔었다.
술을 몇 잔 마시고는 내가 은경이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무리 여학생들이 다 안 가기로 결의를 했다지만 정말 아무도 안 간다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느냐? 난 정말 너희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나올 줄 몰랐다. 나는 이번에 갔다가 오면 같이 가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평생 상종도 안할 생각이다.……
이 눈물겨운 회유와 협박에 착한 은경이는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은경이가 같이 갔다는 얘기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는 조건에 같이 갔다. 국문과에서 조교로 있던 80학번 이병도가 같이 갔고 우리 아홉 명은 선생님을 모시고 청평사로 갔다. 거기서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저녁을 해 먹고 술은 아래 송어횟집에 가서 마셨다.
나는 그날 은경이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남자만 여럿 있는 곳에 혼자서 따라 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남자들이 무슨 위험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얘기가 나가면 다른 여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지도 모를 그 위험을 감수하고 같이 와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우리 국문과 사정을 훤히 아시는 선생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무척 흐뭇해 하셨다. 선생님은 나중에 추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해야 할 것을 다음으로 미루면 그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그러시면서 ‘인생은 늘 토요일 오후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와 선일이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안 온 것을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많이 오고 안 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대희가 주도해서 포커를 쳤다. 나는 카드나 화투는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은경이도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한 쪽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다시 밥을 해 먹었는데 나도 거들었다. 나는 밖에 나가서도 절대 일을 하지 않지만 같이 와준 사람들이 고마워서 식기도 닦고 음식도 나르고 했다. 나는 어디에 가서나 늘 선생님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만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지도교수님을 담임선생님 대하듯 지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여행은 어디에 갔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갔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들었다. 자기들끼리 가서 놀며 좋아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생님이 안 계신 졸업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너무 초라했던 졸업여행이라고 선생님께 송구스러웠지만 그렇게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다녀 온 것이 너무 좋았다. 내 앨범에 빛바랜 졸업여행 사진이 몇 장 있다.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고은, 「열매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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