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8:3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 땅 속에서, 땅 위에서
내가 학회장이 되어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것은 유명무실했던 국문과학회비를 제대로 걷는 일이었다. 어느 학과나 비슷했지만 그 시절에는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5000원 정도의 학회비를 걷어서 그 돈을 전체 MT를 가는 데에 썼다.
학회비를 걷는 것은 각 학년 과대표들인데 의무사항이라고는 해도 강제성을 띄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내면 받지만 내지 않고 버티면 못 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정을 잘 아는 학생이 과대표를 맡으면 일정액만 학회에 내고 나머지는 학년에서 적당히 쓰기도 해서 이 학회비를 어떻게 하면 많이 걷어낼 수 있느냐가 학과의 일을 원활히 할 수 있고 없고의 관건이었다. 나는 이미 학회비의 불분명한 관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나는 먼저 학회비를 1만원으로 전격적인 인상을 단행하고 무조건 100% 징수를 목표로 했다. 과대표들이 돈을 안내서 못 걷겠다고 우는 소리를 했지만 단호하게 걷어냈다. 시한을 주고 그 시한까지 내지 않은 학생은 학회장이 직접 면담을 하겠다고 과대표들에게 지시를 했다.
나는 날마다 과대표들을 불러서 징수현황을 점검했다. 못 내겠다고 버티는 학생들이 각 학년마다 꽤 있었지만 나하고 직접 만나서 돈 얘기를 듣는 것은 다 두려워했다. 그래서 100%는 안 되었어도 98% 이상을 걷어냈다.
내가 1학년에 복학했던 1982년 국문과 MT에 나는 참가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보니 누가 나에게 같이 가자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아서 시골에 다녀왔었다. 내가 국문과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83년, 국문과 2학년 MT때는 내가 과대표를 맡고 있었던 때라 우리 2학년이 많이 참석하도록 독려를 하게 되었다. 가급적 다 갈 수 있도록 하라는 우리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못 간다는 얘들에게도 꼭 가야 된다고 강요까지 했다.
포천 산정호수로 간 국문과MT에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선생님과 조해룡 선생님까지 교수님들이 대거 참석하셨고, 우리 2학년은 학년 자랑 장끼자랑에서 요즘 개그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는 콩트개그를 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군에 가기 전인 영운이, 우곤이, 성호, 선학이 진해 등이 개그를 하였고, 행배가 사회를 보는 등 우리 82학번들이 활약을 많이 했다.
나야 과대표여서 혹 사고라도 생길까봐 밤이 늦도록 순찰을 돌면서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챙겼다. 사실 이런 일은 지금 생각하면 무척 유치하고 우스운 일일 거다. 대학생들이 무슨 사고를 낸다고 그러랴 하겠지만 나는 군에서 모든 것을 챙기고 또 챙기는 것이 몸에 배었던 탓이다.
내가 학회장이 되었을 때는 국문과 MT장소로 대성리 유스호스텔이 예약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김중섭 조교와 선일이가 미리 해 놓았던 일이었다. 이미 예약이 된 것을 굳이 파기할 일도 아니어서 나는 그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지금이야 대학생들도 다 승용차로 MT를 간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가는 낭만이 있었다.
경춘선 기차는 청량리가 아니고 성북역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대략 열 시 경 열차를 타고 갔다. 성북역에서 각 학년 대표들이 1차로 인원파악을 하고 기차를 탄 다음에 대성리역에서 내렸다. MT에 참석하는 교수님들도 전부 기차를 타고 같이 가셨다.
2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번에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차량이 많지 않을 때이긴 하지만 역에서 내려 유스호스텔까지 걸어가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였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서 다시 학년별로 인원파악을 하고 지정된 호실에 배정을 하고 점심식사를 했다.
나는 군에서 생활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인원파악, 이동상황을 수시로 점검했고 그 현황을 선생님께 수시로 보고했다. ‘198명 전원 이상 무, 유동병력 없습니다.’, ‘전원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내가 선생님께 보고한 상황이었다.
누구 군에 안 다녀 온 줄 아느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전체가 움직일 때는 인원파악과 상황보고가 몸에 배었던 바라 나도 모르게 군대시절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나는 MT가 끝나고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탈 때까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우리 학생들이 유스호스텔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나는 원천봉쇄하다시피 했다. 시간 별로 과대표나 내가 신임하는 후배들을 여러 곳에 배치해 학생들이 무단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저녁에는 선후배들이 전공하는 분야에 따라 같이 모여 앉아 서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하고 나는 계속 밖으로 돌면서 사건, 사고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나를 가깝게 따르는 후배들인 중기, 호태, 지형이, 석만이 등을 수시로 불러내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내가 술에 취하면 통제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같이 앉아서 얘기하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어느 자리에 가도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82학번 여학생들은 내가 같이 자리를 할까봐 싫어했지만 83학번이나 84학번 여학생들은 서로 오라고 불렀었다. 나도 웬만큼 입담이 있어서 문학이나 인생에 대해서 몇 마디 할 정도는 되었으나 직책이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 거였다.
나는 밤늦도록 순찰을 돌고 임무를 맡긴 사람들을 불러 인원점검을 했다. 밤에 취해서 나가면 교통사고 위험도 있고 물가여서 잘못 발을 디디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 아침에 일어나서 인원점검을 해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는 밤에만 사고가 나지 않으면 낮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국문과 학생들이 낮에는 여기저기서 공놀이도 하고 길을 건너가 북한강유원지에서 보트를 타고 놀기도 했다.
나도 82학번 향기를 보트에 태우고 강에 나갔다가 혼이 났다. 생각처럼 보트가 잘 나가지도 않았고 뒤집힐 위험이 크다는 것을 탄 뒤에서야 알았다. 손바닥에 물집이 나게 노를 저었고 팔에 알이 배길 정도로 힘이 들었다.
우리는 거기서 점심을 먹고서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나는 가장 큰 행사를 사고 없이 마쳤다는 것이 아주 홀가분했다. 모든 학생이 그 행사를 100%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국문과라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아주 흐뭇했다.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엄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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