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9:0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피는 꽃은
나는 경희대 문리과대 문과 79학번이다. 그때는 계열별 모집이라 국문과로 진학한 것이 아니었다. 문리과대학에는 국문과, 영문과, 사학과, 그리고 79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국민윤리학과가 있었다.
계열로 들어와서는 한 학년을 마친 뒤에 학과로 올라가게 될 때에 우수한 학생은 대부분 영문과를 선택한다고 했다. 영문과에서 밀린 학생들이 국문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희대 국문과는 쟁쟁하신 교수님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영문과가 아니라 먼저 국문과를 택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국문학 지망생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을 진학한 거였다. 계열별 모집이라 문과대로 갔지만 1학년 때의 점수가 좋았다고 해도 나는 영문과로 가지 못했을 거다. 내가 영어를 워낙 못해서였다.
경희대 국문과는 78학번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이미 입학할 때에 쟁쟁한 학생들이 대거 들어와 국문과의 르네상스를 이룰 거라고 많이들 기대했다고 한다. 경희대 국문과는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했지만 70년대 중반기에는 주춤했던 모양이다.
78학번은 다행이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덕규, 이혜경, 김형경, 이문재, 강철주, 장창락, 안재찬(류시화) 등의 문인들을 대거 배출했다. 덕규, 문재, 재찬이 형들은 이런 저런 자리에서 얼굴을 대할 때가 많았지만 형경이, 혜경이 형은 알지 못한다.
내가 소설로 등단한 78학번 혜경이 형을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다. 그 형 고향이 보령이라고 들어서다. 홍성출신 문인은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보령출신 문인으로 내가 좋아했던 이문구 님과 김성동 님이 있어 혜경이 형이 그분들만큼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79학번에는 내가 가깝게 지낸 시인인 이상백과 소설가 서덕순(하진), 평론가 문흥술, 하응백 같은 문인들이 나왔다.
나는 문인들과 가까지 지내지 않아서 서로 얼굴과 이름 정도만 기억한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국문과 동문행사에 많이 참여하고 학과 일을 도왔기 때문에 연세가 많은 분부터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까지 얼굴은 많이 대했지만 나는 문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문인들과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었다.
내가 복학을 하였을 적에 79학번이 4학년이었으나 그중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군에 갈 적에는 입학만 하고 바로 가서 송별회도 못 받고 갔지만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복학했을 때는 4학년에 학수, 응백이, 덕순이가 있었으나 나하고는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내가 2학년이 될 때에 대학원에 진학한 학수, 응백이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고 국문과 조교로 온 덕순이를 알게 되었다. 덕순이는 나중에 필명을 하진이로 해서 서하진이 되었다.
나는 80학번이나 81학번과는 소 닭 보듯 하면서 지냈다. 내가 나이를 현저하게 더 먹었고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주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늘 나이든 82학번들과 어울려 다녔고 뻣뻣했지 사교적인 자세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에 학회장이 되는 바람에 당시 4학년이던 81학번과 같이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81학번은 열여섯 명밖에 안 되었고 복학생이 열일곱 명이었다.
이양섭, 박홍희, 이장호, 양혜경, 이병일, 이병도, 이원걸, 이영근, 유진월, 김준희, 박찬수, 권혁초. 김혜자, 윤진구, 나승인, 한창준, 유한익(80), 김기남(80), 문교진(78), 이정재(78), 양호문(78), 박종륜(78), 윤정춘(78), 김민현(77), 최연호(77), 김근성(77), 이상백(79), 강철주(78), 이원돈(78), 이문재(78), 이승복(78), 최재환(77), 한상준(77),
81학번에서 내게 단연 돋보인 사람은 승인이었다. 승인이는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우등생만 갈 수 있었던 금오공고 출신이었다. 금오공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입국을 위해 특별법으로 설립한 야심찬 공고였으나 박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 졸업생들은 3년 장학생으로 다닌 것이 부채가 되어 군에 가서 5년이나 의무복무를 하고 중사로 전역했다.
승인이는 계급이 중사여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 이름을 날렸다. 나도 공부 좀 한다는 축에 이름이 끼기는 했지만 승인이 하고는 질이 달랐다. 승인이는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대학에 남지 못하고 중등교사로 나갔다. 여러 형편이 공부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80학번 광화는 학교에 다닐 때는 본 기억이 없었다. 1987년도 제 2회 서울사립중고등학교 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영일고등학교에 오게 되었다. 처음에 와서는 술도 마셨으나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어 술은 안마시지만 온갖 잡기에 절정고수로 통한다.
학교 다닐 적에는 스쳐 지났지만 오래 인연이 닿은 사람이 81학번 운선이였다. 운선이는 내가 1학년에 복학했을 때에 2학년 부학회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더니 얼마 뒤에 군에 가느라 휴학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안 볼 때에 나타나서 졸업을 하고 양수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 3월 말에 이직한 국어교사가 있어서 한 사람을 충원하게 되었을 적에 우리 선생님이 운선이를 추천하여 영일고에 오게 되었다. 운선이가 면접을 보러 오던 날, 선생님이 학교로 찾아오셔서 교장 선생님께 추천의 말씀까지 해주셨다. 그런 저런 인연으로 우리 셋은 다 금봉 선생님이 주례를 서 주신 고주회 멤버이기도 하다.
운선이가 내 뒤를 이어 사진반을 맡았을 때에 아이들이 ‘홍금보’라는 별명을 붙여주어 내가 홍을 떼어내고서 ‘금보(金甫)’라고 재명명했다. 어차피 성씨가 홍이니 그냥 금보라고 해도 홍금보가 되었다. 애들은 장난삼아 한 것이지만 나는 금보를 운선이 호라고 생각하고 지은 거다. 내가 학교에서 마시는 술의 반은 금보 때문이거나 금보와 마신 거다.
81학번 여자들하고는 거리감이 많았다. 81학번 여자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지만 나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81학번 여학생 중에 특이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혜경이와 진구였다.
혜경이는 제주도가 고향으로 선생님이 잘 알고 계셨다. 선생님은 혜경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안 보이는데서 칭찬을 많이 하셔 나도 누군지 알게 되었다. 조금 우울하게 보이긴 했지만 어디서 만나든 인사를 해서 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었다.
진구는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 같았다. 얼굴이 너무 어려 보였고 하고 다니는 차림도 어린 학생 같았다. 진구가 81학번 여자대표를 한 적이 있어서 몇 번 같이 자리를 한 적이 있었지만 말 한 번 걸어보지 않았다. 진구도 누구에게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다만 가서 나는 국문과의 이상한 사람 중의 하나로 꼽았었다.
내가 2학년일 때에 4학년 과대표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었다. 문리과대 체육대회를 끝내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랬다. 그날 국문과생들의 참여가 저조했다고 내가 뭐라 했더니 기분 나쁘게 말대꾸를 해서 올려쳤다. 나더러 ‘이영주 군’이라고 하는 바람에 내 손이 번쩍 올라가면서 그대로 따귀를 쳤다.
옆에서 말리는 다른 학생에게는 화분을 집어 던졌다. 그 화분이 선인장인 것을 모르고 잡았다가 가시에 찔려서 그만 놓쳤다. 내가 화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크게 났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로 인해서 나는 위의 학년들로부터 가까이 하기 힘든 저학년 사람으로 찍히고 말았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에서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 자 (0) | 2012.03.28 |
---|---|
나무와 나무 (0) | 2012.03.28 |
해마다 봄이 되면 (0) | 2012.03.28 |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0) | 2012.03.27 |
열매 몇 개 (0) | 2012.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