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9:0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국문과 84학번은 내가 3학년일 때에 들어 온 후배들이다. 1984년은 내가 학회장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선이 되던 해다. 압도적인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표를 몰아 준 84학번 덕이다. 나를 알지 못하고 표를 주었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제대로 알기 전에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문과 84학번 이름들을 보니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지만 이름으로는 다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하고는 여덟 살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다. 두 살 터울로 계산한다면 넷째 동생들이 되는 셈이다.
83학번만 해도 내게 겉으로 드러내놓고 반감을 보이지 못했지만 84학번은 내 앞에서 반기를 든 아이들도 있었다. 시대의 변화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그런 일들을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내가 괜히 흥분하고 괜히 가슴 아파했는지 우습게 생각될 때도 많다.
간배식, 강미경, 경미애, 구병진, 김강식, 김낙준, 김동건, 김명화, 김선호, 김영식, 김옥련, 김우식, 김은아, 김인호, 김재완, 김정수, 김정희, 김지형, 김해숙, 김흥열, 나 섭, 맹종기, 문명란, 문미옥, 박상준, 박선희, 박영미, 박이경, 반순옥, 변창현, 성세윤, 손현석, 신용수, 안영훈, 우호영, 유승선, 유승찬, 유영원, 유현선, 윤경보, 윤소영, 운은경, 이경숙, 이돈천, 이미숙, 이상규, 이상희, 이석만, 이선주, 이성수, 이수영, 이숙영, 이은경, 이은혜, 이재영, 이종갑, 이종필, 이태성, 이효성, 장영길, 장재권, 전병원, 정호충, 조명희, 조선희, 채정혜 최경미, 최승희, 최애희, 최익근, 최 준, 하승철, 허 연, 허영미, 현면준, 홍지연, 황미경, 황범주, 이상 78명
83학번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느라 휴학을 많이 해서 나는 국문과 일에 84학번 남학생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84학번에도 나이가 많은 학생이 몇 있어, 영식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아래라고 들었고 여학생 중에 미옥이와 연이가 다른 애들보다 더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84학번에서 나를 가장 잘 따르고 도와 준 사람이 지형이와 석만이다. 지형이는 학과 수석으로 들어온 우등생이었고 석만이는 1학년 과대표였다. 지형이와 석만이는 성격에서도 나와 성향이 비슷했고 내가 선배라고 깍듯이 따랐다. 나는 학과에서 처리할 것이 있으면 먼저 지형이하고 석만이부터 찾았다.
83학번인 영미와 지미가 84학번들과 같이 다녔다. 그러니까 1년간 휴학했다가 복학을 한 것이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다들 둘을 84학번으로 알고 지냈다.
얼마 전에 내가 충북 증평에 내려가 계신 우리 학교 선생님을 찾아뵈러 갔더니 영미가 거기 충북과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 선생님은 퇴직하신 뒤에 다시 대학 영어과에 들어가셨다. 문학시간에 영미에게 영일고에서 퇴임했다고 했더니, 영미가 ‘이영주’ 선생을 묻더라고 했다. 아마 영미에게 나는 별로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미는 나와 가깝지 않았지만 국문과에서 가장 화려하게 옷을 입고 다녀서 유명했다. 화려하다는 말은 좀 점잖은 표현이고 그때 내 말로는 ‘야하게’ 입고 다녔다고 했을 게다. 지금이야 대학생이 어떻게 하고 다니든 남들이 입에 올릴 일이 아니겠지만 그때만 해도 교수님들이 걱정을 하실 때다. 나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84학번에서 나를 잘 따랐던 여학생은 미경이, 지연이, 상희, 선희, 경미, 명화 등이다. 미경이는 친동생처럼 나를 잘 따랐다. 아마 오빠가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정서가 상당히 맞는 아이였다.
지연이는 대학이전 반대 시위 때에 내게 큰 힘이 되어줬고, 상희는 졸업한 뒤에도 오래 만났다. 선희는 1학년 때 여자대표를 하면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졸업하고는 바로 소식이 끊겼다,
경미는 국문과 여학생다웠다. 아주 애교가 넘치고 여기저기 염문을 흘리고 다닌 것으로 기억하지만 어느 날 미국으로 갔다고 들었다. 국문과 시화전을 할 때에 황순원 선생님이 내게 주신 ‘고백’이란 시의 친필원고를 눈치 빠르게 채 갔다.
명화는 내가 경희대학교 임간교실에서 야외 결혼식을 올릴 때에 와서 식장을 꾸며줬다. 명화는 학교에 다니면서 휴일에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내 결혼식에 여러 가지 도움을 줬다.
의정부에서 어렵게 다녔던 명희 소식이 늘 궁금했다. 너무 멀리서 다녀서그런지 다른 애들처럼 활발하지도 못하고 힘에 겨워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던 터라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었다. 얼마 전에 국문과 동문명부에서 보니까 명희가 양주군청의 공무원으로 나와 있었다. 반가워서 전화를 했더니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가끔 궁금한 것이 순옥이다. 1학년 때 같이 제주도에 답사를 갔었다. 지형이가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경상도 아가씨의 그 강인함이 눈에 보여 근접을 못하는 것이 우스웠다. 경상도 아가씨라도 애교가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뻣뻣하고 억셈이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는 거였다. 지금 어디서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 강인함이라면 사막에서도 견딜 것이라 생각한다.
세윤이도 많이 궁금하다. 자기소개서에 장래 희망에 대통령이라고 써 놓아서 나는 장난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장난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똑똑하고 당찼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나중에 세윤이가 출마한다면 내가 반드시 밀어줄 생각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84학번 여자후배는 지연이였다. 내가 학회장 시절에 국문학과총회에서 보여 준 용기 때문이다.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세상을 떠서 너무 안타깝다.
세월이 흘러서 이젠 거리에서 만나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모른다. 우리 후배들이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만나지는 못해도 소식이라도 듣고 싶을 때가 많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박목월, 「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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