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9:1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새로 들어 온 국문과 83학번은 78명중에 남자가 18명밖에 되지 않는 심각한 여초(女超)현상으로 교수님들의 걱정을 많이 들었다. 여자가 많으면 학과 발전이 저해된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쁜 후배들이 많이 들어와서 수줍은 미소로 ‘영주 형, 영주 형’ 하고 부르는 것이 귀여웠다. 이때는 남자고 여자고 선배에게는 전부 형이라고 불렀다. 나야 나이로 보나 학년으로 보나 명실상부한 ‘형’이었고 형답게 생활했다.
내가 1984년에 학회장을 할 적에 나는 국문과 4개 학년의 학생을 다 안다고 자신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나 얼굴과 이름이 따로 놀아서 많이 놀랐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도 있었지만 나는 정말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기분으로 찾아내었다.
강문석, 고인호, 김구정, 김대현, 김명호, 김명희, 김병화, 김상학, 김석영, 김수정, 김숙기, 김순련, 김순자, 김영미, 김영옥, 김종섭, 김창헌, 김혜영, 김혜정, 김호태, 나윤미, 모연민, 문미라, 문현재, 박경희, 박금화, 박기윤, 박영라, 박윤혜, 박은경, 박은애, 박진경, 서혜욱, 성미경, 송미경, 송숙희, 안명숙, 안선희, 안성숙, 안인석, 양은복, 양희삽, 여미경, 예분해, 오영미, 오영순, 오영희, 원미연, 위정숙, 유미휘, 윤석영, 윤영효, 이경숙, 이경숙, 이경하, 이규동, 이기정, 이미숙, 이봉선, 이성표, 이성혜, 이용은, 이은주, 이정예, 이진희, 임미희, 임승연, 임인옥, 임종기, 임종수, 전향숙, 정영주, 조은덕, 천미희, 최인숙, 최지미, 한원균, 황정희, 이상 78명, 김중기(81)
나는 83학번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내가 78명을 다 잘 안다고 하면 좀 지나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거의 알고 지냈다.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가깝게 지낸 사람들도 많다. 내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83학번이 오히려 82학번보다도 더 많을 거다.
83학번은 82학번보다 들어 올 때의 성적이 월등히 좋았다. 82학번은 복수지원의 미달사태로 어중이떠중이가 다 들어와서 경희대 국문과 최악의 학번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83학번은 영문과와 점수 차이가 거의 안 날만큼 들어올 때의 성적이 좋았다. 게다가 여학생의 숫자가 남학생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도 83학번이 태생적으로 82학번보다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남녀공학인 학과에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성적이 더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서도 그렇다고 하지만 대학에서는 더 그렇다. 남자들이 술이나 마시고 당구장에 다닐 적에 여자들은 그래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같은 과에 다녔다고 하더라도 80여 명이나 되는 학생 수는 엄청 많은 것이어서 1년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보냈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나는 82학번뿐이 아니라 83학번 학생들하고 한두 번은 다 인사를 나누고 지냈다.
국문과 후배가 선배인 내게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가면 불러서 지적을 했다. 내가 같은 학과 선배를 보고 왜 인사도 않고 그냥 지나 가냐고 면박을 주다보니 그런 소문이 퍼져서 후배들은 나를 보면 아예 피하거나 먼저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83학번이 1학년이던 1983년도 1학기에 내가 2학년 과대표를 한 것이 후배들을 더 잘 알게 만들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내가 울릉도로 답사를 갈 적에 1학년 학생들이 대거 같이 간 것이 또 거리를 좁히게 만들었다.
내가 술을 다 사 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깝다는 후배들 중에는 내 술을 안 마신 사람은 없을 거다. 남자들은 술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술로 끝나는 것이어서 마음에 들면 술집부터 같이 갔다. 83학번에서 나를 잘 따른 친구들은 호태, 기윤이, 종수, 석영이, 상학이 등이다. 활발한 성격이던 상학이는 가슴 아프게도 요절하였다고 들었다.
이 친구들은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가까이 지내서 같이 고전문학 강독도 하고 술자리도 자주 했다. 이들이 복학을 하기 전에 내가 졸업을 했지만 다시 연줄, 연줄로 이어졌다.
나는 네 사람의 결혼식에 다 갔었다. 83학번에 석영이가 둘인데 두 사람이 대광고등학교 선후배이고 지금은 같이 만난다. 다섯이 다 고주회 멤버여서 나는 선생님에 관한 것은 늘 여기서 얘기하고 있다.
83학번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아서 여자후배들 중에도 나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으로야 다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보수적이라고 나를 멀리하는 후배들도 많았었다.
은경이는 안성이 고향으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지만 시골소녀의 순수한 멋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울릉도로 같이 답사를 가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다. 다소곳한 언행이 좋아서 자주 만났고 친했다. 은덕이는 은경이와 가까운 친구라 알게 되어 나와 가깝게 지냈다. 은덕이는 83학번 중에서도 공부를 아주 잘 했고 1학년 때 83학번 여자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은덕이는 눈이 커서 개구리 왕눈이의 친구 아롬이라고 불렀다. 진경이도 은경이와 친한 사이였고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진경이는 울릉도 답사도 같이 다녀오고 내가 많이 아꼈지만 나중에 운동권으로 가는 바람에 내 눈에서 멀어졌다.
영순이는 또래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은 학생이었다. 나와 같이 울릉도와 제주도 답사를 갔었다. 영순이는 나이 먹은 티를 전혀 안 내고 이해심이 넓어서 다른 아이들이 많이 따랐다. 연민이, 영주, 영미, 혜영이, 은복이도 울릉도답사와 제주도답사로 친해진 후배들이다.
미숙이는 아버지 고향이 청양이라 내가 좋아했다. 내가 좋아했다기보다도 미숙이가 나를 잘 따랐다. 미숙이는 성격이 서울 애들하고 많이 다른 것도 좋았고 말투가 늘어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명희와 승연이도 나와 가깝게 지낸 후배였다. 명희는 경희서도부였다. 내가 한림회에 관한 벽보를 써 달라고 명희에게 부탁을 자주 했고 그럴 때마다 잘 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승연이는 울릉도 답사 갈 적에 터미널에 가서 버스표 예매를 시켰더니 잘 처리해줘서 흐뭇했다. 명희는 예뻤고 승연이는 귀여웠다.
현재는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깜찍한 면이 있었다. 내가 광운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갈 때 보니 집이 그쪽이었다. 같이 술 한 번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81학번이면서 83년도에 복학하여 83학번과 끝까지 같이한 친구가 중기였다, 중기는 81학번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는 그보다 더 많아서 79학번과 같았다. 중기는 키가 작달막하고 옆으로 퍼져서 조금 재미있게 생겼다. 중기는 나하고 달라서 원래 문학이 좋아서 국문과에 들어왔다고 했다.
중기는 후배라기보다 친구처럼 지냈다. 국문과 82학번과 같이 다닌 수명이, 선일이, 대희와도 다 가깝게 지냈지만 우리 국문과 81, 82학번 중에 중기의 고등학교 후배가 하나씩 있었다.
중기는 선생님을 모실 때에도 자리를 같이 할 때가 많아서 선생님을 댁으로 모셔다 드리는 고역도 많이 했다. 우리 선생님은 술에 취하면 택시기사와 말씀 나누시기를 좋아하셨다. 문제는 그 취중 말씀 때문에 시비로 번질 때가 가끔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지만 중기는 나보다 더 자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중기가 집이 천호동이라 잠실, 광장동으로 선생님을 모셔다드리고 가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중기도 어쩔 수 없이 고주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기가 하나 괘씸한 것은 늘 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거였다. 술통이 나보다 더 크지는 않은데도 더 들어갔다. 술자리를 같이 하면 꼭 내가 억지로 끝을 내야 일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문정희,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