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나비가 되니

2012. 3. 28. 19:19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놀다보니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지

 

1983년 대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내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강서구 등촌동에서 하루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통학시간으로 고생하던 것을 동대문구 이문동으로 옮겨 걸어서 10분 거리에 잠잘 곳을 마련했다.

 

홍성 누나가 소개한 그 집은 딸이 넷에 아들 하나인 영세네로 인자하신 아주머니가 아주 잘 해주셨다. 먼저 있던 등촌동 고종사촌 누님 댁에서처럼 한 달에 쌀 한 짝 정도를 주고서 먹고 자고 했다.

 

학교가 가깝다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었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었으니 차비가 비싸지 않았다 해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깝게 지내는 선일이네 집이 걸어서 3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대희네 집은 버스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여서 나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2학년이 되면서 내가 과대표로 뽑힌 것도 어찌 보면 큰 사건이었다. 내가 과대표가 되고 미희가 여자대표가 되었다. 미희가 여자대표가 된 것은 내가 손을 쓴 거나 다름없었다. 선일이와 대희가 내가 미희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왕이면 둘이 같이 해보라고 미희가 뽑히도록 했다. 과대표라고 하는 직책이 그냥 아이들을 대표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과대표를 맡았다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일이나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거창한 얘기 같지만 나는 국문과를 바꿔 놓고 싶었다. 내가 앞장을 서서 이끌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냥 허송세월을 하면서 보내는 아이들을 내가 바꿔 놓고 싶었다. 나는 선일이, 대희와 상의해서 2학년 개강파티를 을지로 쌍룡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했다. 국문과라고 스스로 궁상맞게 놀기 때문에 남들이 국문과를 우습게 알지만 우리가 우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무리를 했다. 그때 회비를 2만 원씩 걷었다.

 

노강 선생님과 황순원 선생님, 국문과 교수님을 다 모시고 개강파티를 했다. 저녁 한 끼에 16,000원 주고 먹었다. 이 일에 대해 국문과에서 여러 얘기가 많았지만 우리는 그 행사가 국문과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는 한 몫을 했다고 생각했다.

 

여러 변화 중에서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이 국문과 새 조교가 된 화형이 형과의 만남이었다. 명규 형이 학교를 나가 야쿠르트 소장으로 취업을 한 뒤에 조교로 온 화형이 형은 고향이 홍성이어서 우리는 하루아침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비록 같은 고등학교나 중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고향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나는 빈 시간에 늘 국문과사무실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학회실에 자주 드나들다보니 교수님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시간에 뵙는 교수님을 학과사무실에서 뵙고 이런 저런 사적인 얘기도 나누게 되니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노강 선생님과 금봉 선생님을 자주 뵈어 내가 고전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고전문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국문학과의 일이나 교수님의 사적인 일도 화형이 형이 주선하여 내가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 나는 국문과 일에 늘 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은 또 나로 하여금 공부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나는 강의시간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공부를 못한다고 지적을 받을까봐 더 노력하였고 그러다보니 나는 자연스레 공부를 열심히 하는 복학생 반열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3, 4학년에 다니는 국문과 학생들과 1학년에 새로 들어 온 국문과 신입생들에게도 괜찮은 이미지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는 그냥 변두리 국문과 학생에서 국문과의 중심 학생으로 탈바꿈을 한 셈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화형이 형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거야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화형이 형과의 우연한 만남이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나보다 두 살이 위인 화형이 형을 선생님으로 불렀다. 형이라고 부르기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형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화형이 형이 대학을 떠날 때 까지 우리는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술도 많이 마셨다. 대학에서 만나서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우리 선생님이시지만 화형이 형도 내게 무척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장학금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화형이 형의 덕이었다. 1학년 때에 79명 중에서 7, 8위권을 유지하던 내 성적은 2학년 1학기에 학과에서 1등을 하는 이변을 낳았다.지금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화형이 형이 내가 성적을 잘 받을 수 있게 신경을 써 준 과목이 있었다. 그게 한 번 뿐이었지만 그래도 컸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언어학 과목은 내게 두고두고 문제였다. 아니 나도 처음에는 언어학을 싫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좋게 안 나와서 그 과목들을 싫어하게 된 거였다.

 

나는 박사과정, 석사과정에 다니는 선배들하고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다녔고 술자리도 많이 했다. 빈 시간은 주로 학과사무실에서 보내면서 강사로 오시는 분들하고도 가깝게 지낼 수 있어 나는 마치 국문과 조교처럼 행동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던 분들하고도 자주 어울렸다. 우리 선생님을 따라가 만나기도 했고 화형이 형을 따라가서 만나기도 했었다. 내가 술값을 낸 적은 벌로 없지만 대학생이 다니기엔 부담이 컸던 다모아에도 많이 드나들었다. 거기는 여자가 있고 방이 있던 술집이었다.

 

나는 여자가 있는 술집에 다니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곁에 여자가 있으면 얼굴을 들지도 못하는 숫보기였지만 선배들이 가는 자리라 따라 다녔었다. 그때만 해도 촌티가 줄줄 흐르는 나를 보고 많이들 웃었을 거였다.

 

그 모든 것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문과 과목은 다 열심히 했다. 학과성적도 늘 과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좋았지만 과제를 받으면 열심히 했고 강의시간에는 자신 있게 답변했다. 그 성적이 모래위에 지은 집일지라도 그 당시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내가 계속 공부하여 국문과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였다.

 

그러나 내 현실은 공부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으셨고 내 나이도 그때 생각으로는 계속 공부하기엔 많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록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지만 그 시절은 내게 세 번째 황금기였다.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莊周), 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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