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목

2012. 3. 28. 19:3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나는 스물여섯에 대학교 1학년으로 복학을 했다. 단지 군대만 다녀왔을 뿐인데도 남들보다 3년 정도나 늦은 거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나이가 스물일 때에 스물여섯은 꽤 많은 나이였다.

 

국문과 신입생 78명에다가 나까지 79명 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라고 생각했었다. 32일에 입학식이 있다고 들어서 나는 33일에 복학신청을 했다.

 

내가 국문과 학회실에 가서 복학한 학생이라고 신고를 하니까 강의시간과 강의실이 인쇄된 요즘 애들 시간표 같은 것을 줘서 그 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지금 다른 과목들은 거의 생각이 나지 않지만 교양 국어는 금봉 고경식 교수님이셨다.

 

금봉 선생님의 첫 인상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분 같았다. 양복을 입고 계셨지만 그리 세련된 모습이 아니셨고 음성도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를 쓰고 계셨다. 게다가 늘 근엄한 표정을 하고 계셔서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분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교수님들처럼 저명한 분도 아니었다. 그저 강의를 들어오시니까 이런 분도 계시구나 하는 정도였다.

 

당시에 경희대학교 국문과에는 대우교수로 노강 박노춘 선생님, 명예교수로 황순원 선생님, 정교수로 서정범 선생님, 김태곤 선생님, 부교수로 금봉 고경식 선생님, 조교수로 최동호 선생님이 계셨다.

 

국문과 학회실에는 명규 형이 학과 조교로 있었다. 그때는 명규 형이 나이가 꽤 들은 줄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 재수한 76학번으로 나보다 한살 위였다.

 

황순원 선생님이야 워낙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신 분이라 그분께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솔직히 황순원 선생님이 경희대에 계시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노강 선생님은 황순원 선생님만큼은 아니었어도 한국고전문학계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셨다. 한국고전문학계의 1세대시고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시절부터 오셔서 경희대국문과의 살아계신 스승이셨다.

 

내가 복학한 시점에서는 노강 선생님과 황순원 선생님이 퇴임을 하신 상태였고 서정범 교수가 연장자로 국문과를 이끌고 계셨고 그 아래로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선생님이라 예전의 경희대 국문과의 교수진에 비해서는 무게감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서정범 교수님은 원래 어문학자였으나 밖에 알려지기는 수필가와 무속인연구가로 이름이 높은 정도였고, 김태곤 교수님은 민속학의 대가였지만 당시에는 민속학 자체가 국문과에서 그리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최동호 선생님은 경희대 전체에서도 아주 젊은 분이셨다.

 

나는 처음에 시험 감독을 들어오신 최 교수님이 학교직원인 줄 알았었다. 나중에 들으니 학생들 공부 많이 시키고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당시의 국문과 학생들로부터 신망을 많이 받는 분이셨다.

 

나는 솔직히 국문과에 지원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저 합격이 가능한 학과를 찾다보니 경희대에 지원했던 거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경희대학교에 들어간 것과 국문과에 복학한 것은 금봉 선생님을 뵙게 될 어떤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고전문학, 엄밀히 말하면 한문학일 게다. 한문학에서는 노강 선생님이 강의를 나오고 계시니까 전공과목은 거의 노강 선생님이 맡으셨고 금봉 선생님은 국문학과 저학년의 강의와 다른 학과의 교양 국어 강의를 맡고 계셨다.

 

그나마 선생님이 우리 1학년과 가깝게 지내신 것은 금봉 선생님이 82학번 신입생의 지도교수이셨기 때문일 거였다. 당시의 국문과에서는 고등학교의 담임교사처럼 교수님 한 분이 한 학년을 맡아서 지도교수로 전담하시고 계셨었다.

 

노강 선생님이 강의를 하시고는 내게 가만히 이번 아이들(82학번) 계열별 모집이냐고 물으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계열별로 모집을 하면 나중에 우수한 학생들이 다 영문과로 가고 질이 떨어지는 아이들만 국문과로 오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셨다는 거였다. 그런 계열별 모집은 아니었지만 국문과 82학번은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군에 있을 때라 잘 몰랐지만 대학을 지원할 때에 복수지원이 가능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시모집에 17:1이 된 경희대 국문학과가 시험을 보는 당일에는 엄청나게 미달이 되었다고 한다.

 

모집정원이 78명이었지만 실제 응시를 한 학생은 스무 명도 채 안 되어서 다시 추가모집을 했고, 2차에도 또 엄청난 지원자가 몰렸으나 시험 당일에는 또 미달이 되었다고 한다. 하는 수없이 3차까지 추가로 모집을 하여 정말 대학에 들어오기 힘든 아이들조차 들어왔으니 다른 해의 국문과 신입생보다 아주 저조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82학번이었으니 위의 선배들이 그들을 우습게 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금봉 선생님은 82학번 아이들을 조금도 무시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특대생으로 신흥대에 입학하셨다가 이름이 바뀐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시었다고 하셨다. 특대생이란 지금의 성적우수 장학생과 같은 것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선생님은 4년 동안의 학비면제와 생활비 보조를 받으면서 대학에 다니셨다고 들었다.

 

강의시간에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사석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실 때면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자취할 적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복덕방이 빵집인 줄 알았다는 말씀이며, 배급을 받은 치즈를 아끼느라 먹지 않고 두었다가 곰팡이가 난 이야기, 내가 어려서 서울에 올라와 보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선생님은 경상북도 상주가 고향으로 아주 가난한 집의 막내 아들이셨고 만득자셨다. 선생님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머리가 좋다는 것 외는 아무 것도 없으셨다. 물론 당신께서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다만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는 선생님의 기억력을 보면서 우리 국문과생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였다.

 

19822학기 가을에 아이들 입을 통해서 금봉 선생님이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나는 솔직히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몰랐고, 교수님이 박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었다. 대학 교수 중에 박사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의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박사학위를 받는 일은 평생에 아주 자랑스럽고 감격적인 일이라고 1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수여식에 간다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가을에 하루 쉬는 날 집에 가고 싶어서였다.

 

나는 복학생이라고 늘 나이 든 친구인 선일이, 대희, 수명이와 어울려 다녔고, 우리보다 두 살이나 위인 정식이 형과 어울려 가끔 교수님들하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시골스럽고 다른 분들보다 더 인간적인 대학교수님, 금봉 고경식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좋아하고 자주 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분은 황순원 선생님과 금봉 선생님이셨다. 황순원 선생님하고는 두 번인가 자리를 했고 금봉 선생님과는 자주 하는 편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금봉 선생님을 황순원 선생님보다 더 어렵게 생각했었다. 금봉 선생님이 늘 근엄해 보이셨기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자리에 모시다보니 금봉 선생님은 생각보다 따뜻하셨고 우리와 전혀 거리감이 없으셨다.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더 가깝게 선생님께 다가갔고 그런 인연이 삼십년이 넘게 이어졌다. 정숙이, 영희, 은경이, 순희, 미경이도 나와 가깝게 지내면서 선생님과 가까워졌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효근, 버팀목에 대하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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