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공원묘지에서

2012. 3. 28. 19:3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2008615, 선생님 일주기(一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제사로 얘기한다면 어제 밤이어야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격식을 따지지 않으니 돌아가신 날이 일주기인 셈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성남 공원묘지로 갈 일을 규범이와 상의했었다.

 

일요일은 종교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토요일인 14일이 어떨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규범이가 용인에 계시는 사모님과 조율을 한 결과 15일로 날을 잡았다.

 

경희대 국문과에서도 사람들이 온다고 하고 사모님과 우리, 친척분들도 오신다고 했다. 나는 82학번 기태에게 전화를 해서 82학번 중에 같이 갈 사람들 알아보라고 하고 호태와 기윤이에게 전화를 해서 종수, 석영이 등 고주회 멤버들도 참여하자고 얘기했다.

 

나는 영희와 은경이에게도 전화를 했다. 다들 온다고 해서 흐뭇했고 혹 심부름이라도 할 사람이 필요할지 몰라서 우리 애들에게 알아봤더니 대부분 바쁘다고 하여 춘천에 있는 윤구를 불렀다.

 

분당꽃집에 전화를 해서 꽃바구니를 부탁했고 추모식을 한다는 열 시에 맞춰 윤구와 만나서 1500번 버스를 타고 공원묘지로 갔다. 사모님과 우리, 전기호 교수님, 최상진, 김종회, 이정재, 안영훈 교수들이 오고 국문과 대학원생들이 여럿 와 있었다.

 

83학번 종수와 두 석영이가 오고 82학번 기태, 정원이, 용석이, 시만이도 왔다. 웃는 낯으로 인사하기도 그런 자리라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는데 79학번 하진이, 78학번 문재 형도 보였다.

 

묘소 앞에 조촐하게 진설하고 차례로 헌주하였다. 나도 종수, 석영이들과 같이 잔을 올렸다. 여기저기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간혹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다 슬퍼만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감췄다.

 

온다던 은경이도 영희도 소식이 없어서 윤구의 휴대폰으로 영희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추모식이 끝난 뒤에 그 아래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고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기에 거기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하고 갈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을 때에 선일이가 삐삐로 연락을 해왔다. 길을 잘 못 찾아서 헤매고 있다는 거였다. 알아듣게 설명을 했더니 조금 뒤에 그리로 와서 선일이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대략 50여 명이 되는 숫자였다. 삼계탕으로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방 안에서 다시 선생님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상진이 형님이 주재를 하셨다. 먼저 전 교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금봉은 떠난 것이 아니라 늘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고개를 숙이고 울다가 나도 한 말씀 드리겠다고 일어났다.

 

여러분께서 선생님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정말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1년간 선생님 생각을 많이도 했지만 이 자리에서 생각을 해보니 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내년 이 자리에 올 때는 선생님을 추모하는 책 한 권을 반드시 들고 오겠습니다. 그 책을 선생님께 올리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서 나는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을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선생님에 관한 추모집을 생각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이 망설인 것은 선생님도 안 계신데 책은 내어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정말 꼼꼼히 보시고 행간의 의미까지 파악하셨다. 선생님처럼 내 글을 재미있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생님께서 나를 잘 알기에 그럴 수 있으셨던 거였다.

 

백아가 종자기가 죽은 뒤에 거문고 줄을 끊었다(伯牙絶絃)는 고사 성어를 나도 공감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계신 뒤에 글을 쓰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눈물을 닦고 웬만큼 진정이 되었을 때에 내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던 79학번 하진이가 왜 이영주 선생님은 사람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냐고 물었다. 나는 경희대교수들이나 출세한 사람은 다 모른다.’고 대답을 했더니, ‘제가 무슨 출세를 했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작년 선생님 빈소에서 서 선생이 왔다가 아는 체를 안 하고 갔다길래 출세한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다고 대답해줬다.

 

하진이는 그때 일은 기억하는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서 다들 잘 몰라볼까봐 누구를 아는 체하고, 안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가까운 데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인사를 하고 갔다고 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내가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나도 웃으며 내가 서 선생님 책을 열권씩은 팔아주려고 했지만 너무 어려워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나도 제대로 못 읽겠더라고 넘겼다.

 

종회 형이 일어나서 내년까지 국문과에서 선생님 추모집을 만들겠노라고 했다. 그것은 거기서 하면 될 일이고 나는 내가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 82학번들은 따로 모여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다.

 

선생님이 안 계서서 어렵겠지만 앞으로 82학번의 모임을 정례화 하자는 얘기가 오고 갔다. 어느 학교나 동기모임은 있는 것이지만 대학의 동기모임은 고등학교보다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입학과 졸업이 다르게 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거다. 나만 해도 입학은 79학번이고 졸업은 82학번이니 양쪽이 다 어정쩡했다. 또 모임을 주도할 리더가 없다는 것도 문제여서 확정적인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저녁 때, 영희가 전화를 해서 한참 통화했다. 거기를 못 찾아서 두 시간이나 헤매다가 간신히 찾아갔더니 이미 다 끝나고 떠난 뒤였다고 했다. 내가 전화를 두 번이나 했었다고 했더니 운전을 하느라 그때는 못 보았다고 했다. 영희는 그쪽에서 사는 친구에게 계속 전화를 묻고 물어서 길을 찾았는데도 결국 다 끝난 뒤에 도착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내가 어떻게든 찾아오게 했겠지만 선생님도 안 계신 데 오가는 것이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고 말았던 거였다.

 

선생님이 계실 때라면 영희가 어떻게든 찾아와서 만났을 것이고 길을 못 찾은 일로 웃고 즐겼을 일이지만 그러잖아도 울적한 마음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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