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설날

2012. 3. 28. 19:46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나는 해마다 11일에 선생님께 세배를 다녔다. 지금이야 다들 설을 쇠지만 예전엔 신정(양력설)과 구정(음력설)으로 설이 둘이라 집안마다 설이 다른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우리 집안도 한 때는 신정을 쇠었다. 내가 구정에 시골에 내려가서 성묘를 다니고 친척집에 다녀야하기 때문에 신정에 시골어른들과 아우들이 서울로 올라와 차례를 모셨던 거였다. 그때도 나는 차례가 끝나고 어른들이 내려가시면 선생님 댁에 세배를 다녔다. 대학 3학년 때부터 국문과 대학원생들과 같이 만나 박노춘, 황순원,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교수님 댁으로 세배를 갔었다.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조금 지나서는 나 혼자서 다녔다.

 

혼자 다닐 때부터 내가 찾아뵙는 선생님은 노강 박노춘 교수님과 금봉 고경식 교수님 두 분이셨다. 내가 고전문학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교수님은 내가 꼭 모셔야 할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노강 선생님께서 구산동에 사실 적에는 그래도 여러 제자들이 세배를 다녔지만 부천 송내로 이사를 가신 뒤에는 한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아쉬워서 내 제자를 여럿 불러서 같이 갔었다. 송내에 갔다가 다시 금봉 선생님이 계신 광장동으로 가면 하루가 다 가지만 나를 따라 다니는 제자들은 아무 불만 없이 나와서 나하고 시간을 같이 했다. 그렇게 무리를 지어서 다니는 나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것이 선생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댁에 가면 제자교수와 강사, 대학원 석사과정ˑ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여러 무리로 세배를 왔다. 선생님도 일찍 노강 선생님, 황순원 선생님, 서정범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다녀오셔서 제자들 세배를 받으셨다. 선생님은 두 분 은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한 번도 안 거르고 다니셨다.

 

나는 보통 오후 네 시쯤에 선생님 댁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술에 취해 집으로 왔다. 그럼 같이 간 제자들이 잘 챙겨서 나를 우리 집에 까지 데려다 주고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갔다.

 

영일 12기 형희, 13기 창훈이, 15기 광현이, 16기 진기, 19기 용찬이 등이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같이 다닌 제자들이다. 아이들이 군에 가고 대학원에 가서 바빠졌을 때는 집사람이 나를 차로 데려다 주었다.

노강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광장동에만 다녀오면 되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용범이를 데리고도 갔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선생님이 취하셨을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내가 가기 전까지는 술을 덜 드시다가 내가 도착하면 많이 드시어 취하셨다. 나도 그렇게 나를 생각해 주시는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서 주시는 대로 술잔을 받아 마시다가 취하기 일쑤였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맞는 첫 설날은 어머니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 기일은 음력으로 하기 때문에 첫 기일이 1231일에 닿았다. 양력으로 하면 해가 바뀌지 않고 제사가 돌아온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큰 누님내외와 둘째 아우네 계수씨, 조카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아침이 되었다. 설날인 셈이었다. 어제 늦게 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나는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가기가 그래서 성남 공원묘지로 성묘를 다닐 생각을 했었다. 사모님께 가면 괜히 더 슬픔만 드릴 것 같아서였다. 사모님도 나더러 당신께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신 선생님을 생각하라고 말씀을 주시었다.

 

강남역에서 150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곳이지만 버스가 자주 오는 편이 아니어서 많이 기다려야 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고 바람까지 불어서 무척 추웠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가 날더러 선생님하고 아는 체를 했다. 놀라서 보니 영일 19기 갑엽이었다.

 

갑엽이는 마치 등산을 가는 것 같은 복장을 하고 등에는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궁금했던 제자를 만나 반갑고도 놀라웠다.

 

야 인마 너 이게 웬 일이냐, 어디 산에 가냐?”, “아닙니다. 회사에 나가는 길입니다.”, “뭐 회사? 오늘은 휴일인데 어느 회사를 다니길래 나가냐?”, “저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아트센터입니다.”, “! 거기?, 알긴 아는데 거기가 뭐하는 곳이냐?”, “, 농수산물 유통회사입니다”, “아니, 너 사시 본 다고 하지 않았어?”, “, 조금 하다가 잘 안 돼서 그만두고 취업했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거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 네 선배도 지금 하나 하고 있는데 잘 안 돼서 걱정이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나는 갑자기 지난여름에 세상을 떠난 규석이 생각이 났다. 규석이가 늘 갑엽이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던 터라 기억이 난 거였다.

 

야 갑엽아, 규석이 세상 뜬 얘기 들었냐?”, 갑엽이 대답이 들었다고 했는지 못 들었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규석이 얘기로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규석이는 갑엽이와 고3 때 우리 반이었는데 둘이 무척 친했었다.

 

그런데 선생님 어디 가셔요?”, “, ? 대학 은사님께 성묘 가는 길이다. 너희 회사는 휴일도 없이 근무 하냐?”,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이 좀 있어 그냥 나가는 겁니다.”, “너 혹시 명함 가진 것 있으면 한 장 줘라.”, “죄송합니다. 오늘 옷을 바꿔 입고 나와서 명함이 없습니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나중에 연락해서 소주 한 잔 하자.”, “, 꼭 그렇게 하겠습니.”

 

둘이 10분 가까이 얘기한 뒤에서야 버스가 왔다. 갑엽이는 그렇게 추운 날씨에 나 때문에 같이 떨고 서 있었던 거였다. 1500번 버스가 와서 내가 타고 갑엽이는 거기 남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소주 한 병과 오징어포를 샀다. 선생님 생신날에 와서 북어포를 사 가지고 올라갔더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오징어포로 바꿀 생각을 한 거였다.

 

조화(造花)도 몇 가지를 샀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지만 오래 된 것은 색이 바래서 보기에 안 좋았기 때문에 갈아드리고 싶어서였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서 선생님께 소주 석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나머지 석 잔은 내가 마실 생각이었지만 날이 너무 추워서 여유잡고 앉아 있기도 어려웠다. 나는 한 잔만 마시고 남은 술은 묘 주변에 뿌리고 일어섰다.

 

선생님 묘에 꽂혀 있는 조화(弔花)는 색이 바랜 것이 아니어서 바꾸지 않고 끼어 넣었다. 나는 조화(弔花)가 화려한 것은 격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조화(造花)는 다 화려한 색이었고 묘지의 적막함에는 그런 화려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차를 기다렸다가 1500번 좌석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서 오징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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