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2012. 3. 28. 19:5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결혼하던 해에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다녀 온 것이 조금 아쉬워 우리 부부는 여름방학에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해 학수, 아네스와 같이 갔었다. 여행을 같이 간 것은 서로 가깝기도 했지만 내가 학수와 아네스를 어떻게 엮어볼까 해서 같이 가자고 했던 거였다.

 

아네스는 집사람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로 미경이라는 이름 대신에 세례명인 아네스로 통했다. 내 주변에 미경이가 너무 많아서였다.

 

선생님께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도 사모님과 우리, 주환이를 데리고 제주도에 간다고 하셨다. 날짜를 보니 우리하고 엇비슷했다. 우리는 그때 56일의 긴 여정이었고 선생님은 34일이셨다.

 

우리는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완도까지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갔다가 올 때도 완도로 나와서 부산으로 해서 서울로 오는 여정이었고, 선생님은 비행기로 갔다가 비행기로 오는 여정이셨다.

 

제주도에 가서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지도 않았으나 우리는 제주도에서 선생님과 우연히 만났다. 새벽에 성산봉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는 동네 산책삼아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선생님과 길에서 마주쳤으니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었다. 그 시절은 삐삐도 없었고 휴대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붐비는 관광지가 아니라 한적한 시골동네에서 조우했으니 정말 놀랄 일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동네 횟집에 들어가서 자리돔으로 소주 한 잔 올렸다. 내가 신혼(新婚) 여행이 아니라 구혼(舊婚) 여행이라고 했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다. 선생님께서 구혼(舊婚)을 구혼(求婚)으로 들으셨던 까닭이었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가족이랑 여행을 하시는 것보다 우리하고 여행을 하시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사모님하고 같이 다니시면 마음대로 술을 드시기도 어렵고 신경을 쓸 일이 많으시니 힘드셨을 거였다.

 

여정이 같으면 계속 모시고 다녔을 것이지만 선생님은 다음 날 한라산에 오르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거의 다 돌아봤기 때문에 제주시로 들어가서 시내 관광만 하면 되는 일정이라 더 같이 모실 수가 없었다. 우리가 성산포에서 그렇게 우연히 선생님을 뵌 것만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 회갑 때에 제주도여행을 준비했다. 당시에 해외여행이 유행이었지만 내 힘으로 해외여행까지는 못 보내드리더라도 선생님과 사모님이 제주도에 다녀오실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행사에 알아보고서 23일의 짧은 코스로 여행권을 준비했다. 차를 빌리는 것 까지 다 해서 40만 원 정도가 들어갔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는데 여행을 가서 그냥 다니실까봐 술을 드시라고 10만원은 따로 넣어드렸다.

 

나를 이해하고 따라 줄 사람이 두셋만 있어도 선생님을 해외여행으로 모실 수 있었겠지만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제주도 여행만으로도 무척 흐뭇해하시어 나도 덩달아 흐뭇했다.

 

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앞에 두었을 적에도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선생님께서 여름 학기가 끝나시고 퇴임을 하시는데 이번엔 정말 해외여행을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해외여행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만원은 훨씬 넘을 것 같아 그 경비를 마련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고주회였다.

 

경희대 국문과의 서정범 교수님께서 주례를 선 사람들 모임을 서주회라 하고 우리 선생님께서 주례를 선 사람들을 고주회라 불렀다. 양쪽이 다 꽤 많은 숫자였다. 서 교수님은 술을 전혀 안 하시기 때문에 그 팀들은 늘 서주우유만 마실 거라는 데서 서주회가 되었고, 우리 팀은 선생님부터 고주망태여서 다들 고주망태가 될 거라는 데서 고주회가 된 거였다. 나는 고주회의 서열 세 번째에 해당하지만 위의 두 분과는 연락이 잘 안 되어 당시는 내가 맏형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께서 주례를 선 사람은 국문과 이외도 무척 많았지만 서로 연락이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파악해보니 82학번들만 대충 파악이 되고 83학번부터는 누가 고주회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는 우리 학교에만 80학번 광화, 81학번 운선이가 있고, 화곡고에 80학번 상우, 85학번 흥규, 등촌중학교에 84학번 기윤이가 있었다. 영희도 고주회이고 은경이도 고주회여서 거기도 연락을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걱정해서 10만원씩 걷으려다보니 돈이 너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20만원으로 올려서 걷었다. 그래도 다 해야 200만원이 채 안 되었다. 영희는 적어도 300만원은 되어야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다면서 돈을 더 걷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교사들이 20만원씩 내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인데 거기다가 더 내라고 하면 다들 힘에 겨울 거였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평소에 선생님과 가깝게 지낸 제자들이었다. 나는 70학번 인길이 형님, 78학번 수명이, 79학번 흥술이와 82학번 순희, 82학번 선일이, 82학번 미경이, 83학번 미경이 등에게 선생님 정년퇴임 여행의 취지를 이야기 하고 20만원씩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고맙게도 다들 두말없이 협조를 해줬고 같은 고주회이면서 선생님과 갈등이 있어 얼굴을 안 보이던 79학번 학수도 자기 부인 이름으로 20만원을 보내와서 목표로 했던 300만원이 만들어졌다.

 

영희더러 여행사를 알아보라고 했더니 영희는 괌으로 얘기했지만 그쪽 여행이 갑자기 중단되는 사태가 생겼다. 선생님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시면서 캄보디아 앙코르왓 유적지를 돌아오셨다. 선생님이 흐뭇해 하셨음은 물론이고 나도 무척 흐뭇하고 고마웠다.

 

여행을 다녀오신 선생님께서 다들 초청해서 술을 한 잔 내신다고 연락을 주셨지만 다들 일이 있다고 못 오고 나하고 은경이 기윤이 등 몇 사람만 종로 사조참치에서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좋은 제자들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2007년 설날에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갔을 적에 선생님은 큼지막한 대학노트를 꺼내 오셔서 내게 보여주셨다. 며칟날 누구를 만나서 술을 마신 일, 어떤 제자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간 일, 우리가 해외여행을 보내 준 일, 거기에 누구, 누가 참여했는지 다 기록해 놓고 계셨다.

 

선생님이 좀 더 사셨더라면 우리는 선생님 칠순에 또 그런 행사를 준비했을 거였다. 나는 잔치를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여행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젠 잔치도 여행도 다 임자 없는 술잔이 되어버려 서글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