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9:5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가을이 깊어갈 때 학교에 무슨 일인가 있어서 일찍 끝난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보충수업수당을 받아 조금 여유가 있었다. 선생님께 뵈러 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교육대학원 원장실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부지런히 회기동으로 갔다. 내가 원장실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뒤에 나가시자고 말씀을 드렸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셨다.
내가 심심한 생각에 남양주 동화중학교에 있는 영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영희는 날더러 선생님을 모시고 그리로 오라고 했다. 지가 서울로 들어오면 좋으련만 이렇게 내가 무슨 일을 하려면 편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영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선생님을 모시고 도농으로 오라고 한다고……. 선생님은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셔서 나는 선생님과 함께 나가 165번 시내버스를 탔다. 시간이 오후 퇴근 무렵이어서 시내버스는 무척 붐볐다.
나는 영희의 이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을 모실 계획이 있으면 처음부터 자기가 알아서 시간을 정하고 계획을 세워서 언제 어디로 몇 시까지 모시고 오라면 좋을 것을 꼭 내가 전화를 한 뒤에야 이렇게 나오는 것이 싫었던 거다.
양수리나 팔당 방면은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자주 가는 코스였다. 회기동에서 밖으로 나간다면 그쪽이 제일 낫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늘 그대로시지만 같이 모시고 다녔던 사람들은 많은 변동이 있었다,
학수, 익성이, 미경이도 같이 많이 갔고, 내가 주선한 단체 모임으로도 몇 번 갔었다, 한 때는 스승의 날 때에 이쪽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어느 해인가는 몹시 추운 겨울날에 85학번 은희와 혜영이와 미경이, 학수와 선생님을 모시고 팔당에 간 적이 있었다. 팔당댐 건너 작은 마을에서 송어회를 대접했는데 그날은 정말 추웠다. 아마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는 넘게 내려갔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오리털파카를 입고 가서 그래도 견딜 수 있었지만 혜영이가 추위에 엄청 떨었다. 그래서 내가 장갑 낀 손으로 혜영이 귀를 감싸 쥐고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저런 추억을 되새기며 가다보니 교문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 버스가 비었다. 사람 사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닌가 하며 내가 선생님 뒷자리에 앉았더니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으셨다. ‘저야 아무데든 다 좋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오늘은 내가 가자는 곳으로 가보자’고 하셨다. 내가 미리 어디로 모신다는 말씀을 안 드린 날은 선생님께서 가자시는 곳으로 가는 것은 언제나 당연한 일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나를 존중해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동화중학교 교문 앞에서 내려서 학교로 들어갔다. 이 학교는 영희가 있어서 여러 번 온 곳이지만 예전엔 학수도 잠깐 동화고등학교에 있었다. 학수는 동화고에 있으면서 동화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과 결혼을 하고는 지금은 휘문고등학교에 가 있다.
예전엔 대희도 덕소에 있는 덕소고등학교에 있었지만 지금은 분당 송림고등학교로 가서 이쪽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영희뿐이었다. 내가 수위실에 가서 이영희 선생님을 찾아 왔다고 얘기했더니 거기서 교무실을 가르쳐주었다. 선생님과 나는 교무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아이들이 막 몰려나오는 것을 보니 종례가 끝난 모양이었다.
시끌벅적한 애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애들이 생각났다. 우리 애들은 고등학생이라 중학생들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은 편이다. 애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난 뒤에 선생님들 모습이 보이더니 영희가 나왔다.
선생님과 나는 영희가 운전하는 프라이드 베타를 타고 길을 떠났다. 선생님이 덕소로 해서 월문리, 시우리로 가는 길이 좋다고 말씀하시어 길도 잘 모르면서 영희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운전을 했다. 영희는 차를 산지도 얼마 안 되었지만 주로 출퇴근할 때만 차를 가지고 다니니까 운전이 서툴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길은 도로가 많이 좁고 길이 굽은 곳이 많은 시골길이어서 영희가 무척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나는 내가 처음 가는 길인 줄 알았으나 가면서 보니 촬영을 다녀오다가 양수리 부근이 막히면 우리도 가끔 이용하는 산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 길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비상시에는 좋았지만 길이 편도 길이어서 앞에서 차가 오면 낭패였다.
그런 길이라 웬만해서는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그 길을 알고 계신지 궁금했다. 산 속으로 작은 마을들이 몇 곳에 있고 집들이 군데군데 있기는 했지만 정말 외진 곳이었다. 게다가 고개가 제법 높아서 예전엔 고개를 넘지 않고 서로 반대편으로 돌아다녔던 길이었다.
선생님은 연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고 나는 선생님 말씀에 대답을 하면서 길을 살피고 있었다. 간신히 차가 한 대 다닐만한 좁은 길이 계속 이어졌고 길 좌우로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서 보기엔 좋았으나 영희 운전하는 것이 불안했다.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선생님은 전혀 내색을 않으시고 예전에 있었던 얘기와 82학번 사람들 얘기를 이으셨다.
선생님은 뒷자리에 앉으셨고 나는 영희 옆에 앉았으니 영희가 운전하는 것이 그대로 보이고 또 길이 험난하다는 것도 잘 보여서 나도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차가 가장 좁은 농로로 들어서면서 불안 불안하게 하더니 차 우측 앞바퀴가 도로를 벗어나 공중에 뜨고 말았다. 영희가 바로 브레이크를 잡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차가 그냥 논 속으로 쳐 박혔을 거였다.
나는 차에서 얼른 내렸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뒤쪽으로도 100여 미터, 앞쪽으로도 100여 미터는 나가야 공간이 있었다. 그 상황에 우리 앞쪽에 승용차가 한 대 와서는 우리가 빠져 나오길 바라고 서 있었다. 내가 논으로 들어가서 차를 들어보았지만 쉽게 들리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했다. 그때 앞에서 기다리던 승용차 안에서 아저씨가 나오더니 우리 곁으로 와서 영희보고 비키라고 하고는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후진하여 길 뒤쪽 공간으로 옮겨 주었다. 그러고는 우리가 쉬는 사이에 자기 차를 몰고서 지나갔다.
그 아저씨가 그 동네에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이 분명했다. 영희가 조금 진정한 뒤에 다시 그길로 나가서 한 굽이를 도니까 청평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선생님은 양수리로 해서 문호리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문호리 길은 도로가 넓어서 영희도 부담 없이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문호리 어디로 가시나 했더니 어느 산골짜기에 있는 간판도 없는 집이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오셔서 닭볶음을 아주 맛있게 드셨다고 그 집으로 가신 거였다. 거기서도 선생님을 알아보고 ‘교수님, 교수님’ 하면서 대우가 극진했다. 우리는 닭볶음을 시켜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영희는 원래 술을 안 하는데다가 운전까지 해야 해서 한 잔도 안 하고 나하고 선생님만 소주 두 병씩 마셨다.
그 집 아들이 금곡 어디선가 자동차정비소를 한다고 했다. 노인 내외분이 사시면서 그렇게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닭을 잡아서 요리를 해준다는 거였다. 어느 새 시간이 아홉 시를 넘어 우리는 일어섰다. 나올 때에 할머니가 근처에서 주운 밤이라고 밤을 한 봉지씩 싸 주셨다.
우리는 문호리로 해서 양수리로 나왔다. 양수리 철길 아래에 있는 초가집추어탕도 선생님을 자주 모시고 가는 곳이지만 그날은 그냥 지나쳐서 왔다. 내가 양수리로 사진을 찍으러 많이 다니면서 자주 드나들어 내가 가면 아주 반겨줘서 좋았고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 깍듯하게 대해줘서 더 좋은 곳이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이 그림을 그리러 그곳에 자주 오신다며 추어탕집 말씀을 많이 하셨다. 왕년에 선생님이 대학을 갓 졸업하시고 수도공고에 몇 년 계신 적이 있었다. 그때 양수리에 사는 어느 가난한 학생이 학비 때문에 학교를 못 나와서 교장선생이 담임교사더러 자퇴를 시키라고 했지만 담임교사였던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그 뒤로 바로 그 학교를 떠나서 그 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학생의 고향이 양수리인데다가 선생님이 보시기에 추어탕집 사장과 나이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하셔서 추어탕집 사장에게 그 얘기를 하셨던 모양이다. 추어탕집 사장은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 학생이 자기 친구인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친구가 양평군 강하면에 산다면서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더니 얼마 뒤에 그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하셨다.
그 제자는 지금 잘 살고 있다면서 ‘선생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꼭 한 번 모시겠으니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해서 언제 가서 만날 생각인데 영주가 같이 가야겠다고 하셔서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가겠다고 말씀 드렸다.
영희는 올 때 너무 놀라서인지 차를 빨리 밟지를 못했다. 운전을 전혀 모르는 선생님이 밤길에 차가 없을 때는 하이 빔을 켜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영희는 하이 빔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늦어지는 것이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선생님과 영희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다.
선생님 댁 앞까지 모시고 갔더니 시간이 열한 시가 넘었다. 선생님은 맥주 한 잔 더 하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너무 늦으셨으니 그만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가 버거울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영희는 어차피 술도 못 마실 것이니 선생님하고 둘이 마시다가 너무 늦어지면 사모님도 집사람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그냥 들어가시는 것이 못내 서운한 눈치이셨으나 우리는 애써 선생님을 아파트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섰다. 영희가 나를 집에 까지 태워다 주면 좋으련만 늦었다고 걱정하길래 빨리 가라고 보낸 뒤에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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