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0:1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1988년 설날 내가 선생님께 세배를 드리러 갔을 때에 선생님이 여행을 떠나자고 말씀하시어 나는 날을 잡고 같이 갈 사람들을 모았다. 국문과 졸업생들이 자기들끼리는 여행을 좋아해도 선생님을 모시고 간다고 하면 다들 꺼리는 것이 그때 사정이었다. 아무래도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 여러 면에서 부담스럽기 때문일 거였다.
나는 꼭 갈만한 사람만 불렀다. 휘경여중에 있는 80학번 장익성 선생과 4학년에 다니고 있던 83학번 호태, 그리고 영일고 3학년 학생 형희였다.
형희는 내가 담임을 한 적은 없으나 2학년 때 내가 1년 수업을 한 아이였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2학년 때 내가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형희가 요리사가 꿈이라고 해서 많이 놀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요리사가 되겠다는 얘들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형희가 특이한 아이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늘 불러서 일을 시키고 내가 가는 곳에 형희를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그때 형희는 세종대학교 관광대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져서 경희호텔전문대에 간다고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여행코스는 내가 잡았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영월 장능과 청령포에 들러서 본 다음에 영월에서 하루를 자고, 월정사와 상원사에 들렀다가 설악산으로 가서 척산에서 하루 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출발은 2월 중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눈이 무척 많이 오던 시절이다. 우리가 청량리에서 중앙선을 타고 영월로 가다보니 온 천지가 다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때 눈으로 덮인 제천역에서 잠깐 내려 사진을 찍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는 영월역에 내려서는 버스로 움직였다. 장능에 가보니 나무들이 대부분 능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춘원 선생이 『단종애사』에서 나무들도 슬퍼서 그러고 있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 말씀을 하시면서 나무들이 바람 때문에 숙인 것이지 무슨 슬픔 때문에 그랬겠냐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장능 주변의 나무들만 다 끝부분이 약간씩 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단종애사를 읽지 않았던 터라 선생님께 책 잡힐까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청령포가 맞는 말이지만 역시 춘원 선생이 청랭포라고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청랭포로 잘못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면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정말 조심해야 할 문제이다. 한 번 잘못 굳어지면 다시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령포에 건너갔다가 나왔다. 철도가 이곳으로 지나기 전까지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겠으나 수시로 지나면서 굉음을 울리는 기차 때문에 많이 아쉬웠다.
영월에서 하루 자려고 민박까지 예약을 했다가 우리는 그냥 진부로 나갔다. 진부는 생각보다 영월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또 다음 날 일찍 움직이려면 나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전에 가서 먹어 본 부일식당의 산채정식도 우리를 진부로 가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였다.
진부 부일식당도 이젠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정말 먹을 만했었다. 우리는 여덟 시가 넘은 뒤에 그 식당에 가서 산채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여관을 정해놓고 나가보니 술을 마실 만한 곳이 없었다. 한 겨울이라 그런지 그 시간에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문어와 초장을 사다가 여관에서 소주를 마셨다. 익성이와 호태는 피곤하다고 별로 마시지 않았지만 선생님과 대작을 한 나는 꽤 마셨다. 선생님은 여행 중에도 밤에는 많은 술을 드셨다.
아침에 일찍 상원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일곱 시 반차로 손님이라고는 우리와 스님 한 분, 그리고 절에 가는 것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어 분이 전부였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리는 길이라 상원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가 나오면서 월정사에 들르기로 했다.
나도 속이 안 좋았지만 선생님은 작취미성(昨醉未醒)이셨다. 내가 선생님 바로 앞에 앉아 있으니까 선생님께서 내게 귓속말로 차 안에 앉아 있는 스님을 가리키며 저 땡중 술이 아직 안 깨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엔 그 스님은 멀쩡했고 선생님이 아직 덜 깨신 모습이었다. 나는 괜히 차 안에서 시비가 될까봐 얼른 다른 이야기로 선생님의 관심을 돌렸다.
문제는 상원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상원사에 도착해서 보니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무릎이 닿을 정도의 눈을 길만 치워놓은 상태였다. 상원사를 한 바퀴 돌면서 목이 말라 수각(水閣)을 찾았더니 수각이 건물 속에 있었다.
선생님께서 그 건물을 보면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말씀하시니까 절에서 나온 스님이 그 얘기를 듣고는 매우 기분 나쁜 어조로 시비를 걸어 왔다. 잘 알지 못하면 가만이나 있지 괜히 아는 척을 한다고 말을 하는 스님에게, 나도 조금 언짢아져서 그럼 잘 알 수 있게 설명을 해주시면 될 것이지 그렇게 말씀을 하느냐고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해서 말이 곱게 오가지를 않았던 것 같다. 스님의 말은 겨울에 날이 춥기 때문에 건물로 수각을 보호하지 않으면 물이 얼어서 사용할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말로만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내려오려 했지만 절로 들어간 스님의 뒤에다 대고 선생님이 순 땡중들이 잘난 체 한다고 한마디 더 하셨다.
이 말은 우리끼리 한 것이었으나 건물에서 나오던 비속비승의 젊은 아줌마가 듣고서는 바로 들어가 스님 둘을 이끌고 나왔다. 우리가 땡중이라고 욕을 했다고 스님들을 불러냈으니 일이 간단히 끝날 수가 없었다.
마침 눈 속이고 길만 뚫려 있어서 여럿이 판을 벌릴 수는 없었고, 아까 말을 삐딱하게 했던 스님이 앞에 서고 나도 맨 앞에 서서 서로 멱살잡이를 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말실수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말에 멱살 잡으며 덤비는 중이라면 정말 땡중이지 아닐 것도 없지 않은가? 지가 무공을 닦았다면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나도 힘깨나 쓴다고 생각할 때라 같이 멱살을 잡고 섰다.
서로 입에서 욕설이 나올 참에 아래에서 올라오던 등산객들이 우리를 보고 소릴 질렀다. 신성한 절 마당에서 지금 무엇을 하느냐는 질책이 계속 들려왔고,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스님이 절에서 나와 뜯어 말렸다. 그렇게 돼서 한바탕 활극이 될 번한 사건은 일단락이 되고 나는 서둘러서 선생님을 모시고 절을 벗어났다. 잘잘못을 떠나서 누가 본다면 우리나 그 스님이나 똑 같은 사람으로 볼 것이고 거기서 또 경희대 국문과 교수 얘기가 나오면 망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려오니까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가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얼른 버스에 타고서 월정사에 와서 내렸다. 월정사도 눈으로 덮여 있어 몇 군데만 돌아보고 나와서 우리는 절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선생님은 계속 그 땡중 얘기를 하시면서 영주가 한번 메다꽂았어야 했다고 아쉬워하셨지만 둘이 마주 붙었으면 누가 꽂혔을지 모를 일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절에서 운동하는 스님이 나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넘어가서 경포대와 오죽헌에 들렀다가 기사문리로 갔다.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함지에 두부를 담아가는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내가 파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두부 두 모를 사가지고 기사문리에 내려서 38휴게소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갑자기 형희에게 휴게소 주방에 가서 간장을 얻어오라고 시키셨다. 내가 놀라며 이런 데서는 밖에서 가져 온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면서 형희에게 다시 시키셨다. 나는 솔직히 당혹스러웠지만 다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서 그냥 구경만 했더니 형희가 가서 간장을 얻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두부를 먹자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아이들에게는 이런 일도 시켜봐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형희에게는 어디에 가서든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 좋은 일이나 그 휴게소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우리는 기사문리에서 작은 횟집에 들렀다가 다시 척산온천까지 갔다. 숙소를 정한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속초시내로 나와서 우리는 저녁을 겸한 술자리를 했다. 중앙시장인가 하는 곳이 저렴하다고 들어서 그리로 가서 한잔 했다.
한 잔 하신 뒤에 선생님은 속초거리를 걸으시다가 나더러 여기에 ‘신언하’라는 국문과 졸업생이 살고 있으니 찾아보라고 하셨다. 그분은 속초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전화번호도 없고 속초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름만 가지고 어떻게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서 젊은 약사에게 혹 속초고등학교에 계시는 신언하 선생님을 아시냐고 물었더니, 다행이 그 약사의 은사라고 했다. 그 사람이 찾아 준 전화번호를 가지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셔서 신언하 선생님과 다음날 아침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셨다.
신 선생님과 다른 한 분이 같이 우리 숙소로 찾아오셨다. 두 분은 우리 국문과 대선배로 선생님보다는 후배셨지만 대학시절을 같이 보내셨다고 하셨다. 선생님과 두 분 선배님은 그길로 바로 술집으로 직행을 하시었다. 우리도 따라 갔지만 같이 마실 자리가 되기는 어색했다. 나는 그런대로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지만 익성이와 호태, 형희는 같이 있기가 어렵다고 밖으로 나가서 시간을 보냈다.
세 분이 같이 자리를 한 것은 20년도 더 된 일이라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던 우리 일정이 선생님 술자리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느라 오후가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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