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만 믿고

2012. 3. 30. 20:22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여우가 호랑이 위세를 믿고 까부는 것을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한다. 나도 한 때 선생님의 위세를 믿고 많이 까불고 다닌 적이 있다.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후배들 취업할 때에 선생님의 위세를 빌어 간여한 일이 여러 건이 있었다.

 

나는 영희가 동화중학교로 갈 때와 익성이와 미경이가 휘경여중에 갈 때. 금보가 영일로 올 때, 그리고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미경이가 창덕여고에 원서를 낼 때 등에 간여하였다.

 

선생님은 제자들이 취업을 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발 벗고 나서셨다. 내가 간여한 일이 조금 있지만 그 밖의 많은 곳에도 선생님은 발걸음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선생님이든 제자가 취업한다는데 모른 척할 분은 없겠지만 우리 선생님은 관심만 두신 것이 아니라 몸소 찾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영희가 동화중학교로 간 것은 순전히 지형이의 도움이었다. 지형이가 국문과 조교를 할 때는 내가 이미 졸업한 뒤였다. 하지만 지형이는 학과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연락을 하여 내 의견을 많이 따라 주었다. 나는 지형이에게 당부하기를 교사 의뢰가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거쳐서 하라고 일러두었다. 내가 생각한 우선순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82월에 지형이가 내게 전화를 해서 동화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국문학과사무실로 오셔서 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하셨다고 알려왔다. 나는 바로 영희에게 연락해서 영희가 그리로 갔지만 정식 임용은 아니고 계약직이었다.

 

그렇게 해서 1년이 거의 지난 어느 초겨울 날 경희의료원에 있는 희섭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형님 후배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는데 모르고 있냐는 거였다. 처음엔 어느 후배인지 나도 어리둥절했지만 희섭이 설명을 듣고는 영희 아버지인 줄 알았다. 희섭이는 내가 영희와 만날 적에 두어 번 본 적이 있어서 내게 그런 전화를 한 거였다.

 

내가 영희가 있는 동화중학교와 같은 재단인 동화고등학교에 근무하는 학수에게 전화를 했더니 학수는 자기도 소식을 들었다면서 나더러 같이 문병을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일요일로 날을 잡아 만나서 경희의료원에 갔더니 영희는 없고 영희 어머니와 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대학시절에 영희와 가깝게 지낸 사이라 영희 어머니와 언니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를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으나 아주 심한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조금 뒤에 교회에 갔던 영희가 병원으로 와서 셋이 나가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학수가 영희더러 학교에서 무슨 소식이 있었냐고 물으니까 영희 대답이 아무 얘기도 없었다고 했다.

 

영희가 1년을 기간제로 있었으니 이제 학교에서 정식으로 임용을 해준다는 얘기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얘기가 없다는 거였다. 내가 그럼 자리가 없는 거냐고 물었더니 영희는 자기 자리에 누군가 들어와야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한 사람을 임용하게 될 것이 분명한 일이니 내가 먼저 손을 쓰고 싶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오늘 중에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영희하고 둘이 잠실로 갔다. 내가 선생님께 영희에 관한 상세한 말씀을 드리고 선생님이 동화중학교 교장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주면 일이 될 것 같다는 내 생각을 올렸다.

 

선생님께서도 영희 일이라면 쾌히 가시겠다고 하셔서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다음 날로 시간을 잡았다. 그렇게 얘기가 돼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영희 자신이 혼자는 못할 일이니 내가 도울 수 있다는 것도 흐뭇한 일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시간이 끝나기만 기다려 회기동까지 택시를 타고 단걸음에 가서 교육대학원장실로 가 선생님을 모시고 나왔다. 나는 경희의료원 앞에서 사과 한 상자를 사서 택시에 싣고는 영희와 약속장소에서 만나 영희네 교장 선생님이 사시는 동네로 갔다.

 

영희도 가 본 적이 없는 집이라 간신히 찾아갔더니 공교롭게도 교장 선생님은 외출 중이셨다. 교장선생님 사모님께 우리 선생님이 찾아오신 말씀을 전했다. 이런 일은 직접 만나서 부탁을 드려야 할 것인데 만나지를 못했으니 앓던 이를 그냥 둔 것처럼 마음이 편하질 않았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 내가 영희에게 전화를 해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다고 했다. 날은 자꾸 가서 해가 바뀌려 하는데 아무 얘기도 없다면 무엇인가 안 좋은 징조 같았다.

 

내가 영희에게 다시 한 번 선생님을 모시고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선생님께 너무 송구스러워서 다시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생님께 전화로 한 번만 더 가시자고 말씀드렸다. 중간에서 그만두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니 송구스럽지만 선생님이 한번만 더 가주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가 다시 모시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도 그러마고 말씀 주셔서 다시 날을 잡았다.

 

이번엔 학교로 가기로 했다. 내가 조금 일찍 출발하면 그쪽이 퇴근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내 시간표를 보고는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 한 시간을 먼저 나갈 생각을 했다. 내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조금 일찍 출발했다. 선생님을 모시고 동화중학교로 가니 거기도 막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바로 교장실로 가셔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영희 임용얘기를 부탁하셨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께 두 번이나 발걸음을 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시고는 교사 임용 문제는 당신 소임이 아니지만 최대한 힘을 써 보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만 얘기를 들었어도 우리는 다 무척 홀가분했다. 나하고 선생님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되고 안 되고는 영희의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1월 말에 나는 해남으로 연수를 갔었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집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께 인사를 여쭐 때 하루는 집사람이 영희가 안 되었다는 전화를 했다면서 어쩌면 좋으냐고 걱정을 했다. 꼭 되리라 확신을 가졌던 일이라서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영희에게 전화를 해서 위로를 하고 내가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반드시 교사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23일의 술로 연속된 연수를 끝내고 서울로 왔더니, 영희가 다시 그 학교에 정식으로 임용되었다고 전화를 해왔다. 영희가 임용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너무나 좋았다. 졸지에 선생님 덕으로 나도 무엇인가 한 것처럼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