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0:1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내가 우리 선생님을 모시고 갔던 국문과의 답사가 다섯 번이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모든 학생 중에서 국문과 행사로서의 답사를 다섯 번이나 다녀 온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다섯 번이나 답사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선생님 때문이었다. 물론 나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선생님이 가시기에 모시고 갈 수밖에 없었다.
경희대 국문과에는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는 답사가 있었다. 학교에서 지원금이 나오고 학생들이 일정액을 분담하여 일주일 정도의 여정으로 국내 어디든 갈 수가 있었지만 실제로 참여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국문과 답사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교수님 몇 분하고 학생까지 해서 늘 여남은 명 정도가 다녔다고 들었다. 우리 선생님이 국문과 조교로 있을 때는 노강 선생님과 황순원 선생님을 모시고 다녔다고 하셨다. 그때 그분들은 저녁에 1원짜리로 ‘섯다’를 하셨다고 했다.
내가 2학년 때는 국문과 답사가 울릉도로 결정이 되었다. 그때 나는 과대표를 한데다가 처음으로 장학금까지 받았던 때여서 그런 행사에 빠질 수가 없었다. 특히 국문과 조교를 맡고 있던 화형 선배가 답사에 대한 모든 문제를 내게 맡겨주는 바람에 나는 아주 신이 나서 준비를 했다.
우선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자고 얘기를 해서 선일이와 영희, 미희가 가기로 했고 1학년에서 중기가 간다고 했다. 서로들 연결이 되어 전부 스물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간 것은 내가 노력한 결과였다.
노강 선생님께서 가신다고 하여 금봉 선생님이 걱정을 하셨지만 내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평소에 가까이서 모시고 싶은 어른이 함께 가신다니 나는 절로 신이 났다.
그때는 인터넷시대가 아니라서 다 발로 뛰어야 자료를 구할 수 있었고, 살 수가 있었다. 우리는 영동고속도로를 통해서 삼척 임원항에 가서 배를 타고 울릉도 저동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울릉도에 가서 즐거웠던 일도 있었고 가슴 아픈 추억도 있었지만 그 여행은 나를 좀 더 성장시켰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여행을 가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답사로 인해 선생님과 서로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내 삶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3학년 여름방학 답사는 제주도로 갔었다. 역시 선생님이 지도교수로 함께 하셨고 77학번 김중섭 조교가 인솔책임자였다. 이때에도 응백이가 같이 가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응백이는 이미 제주도로 국문과답사를 다녀왔던 경험이 있어서 일정이나 여정을 짜는 일에 훤했다. 영희가 같이 갔고 1학년에서 지형이가 따라와 나를 많이 도왔다.
제주도는 비행기를 타고 가면 쉽지만 학생들이라 비행기 탈 돈이 없어 우리는 그때 배를 타고 갔다. 용산역에서 밤 열한 시에 목포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밤새 내려가서 아침에 목포에서 내렸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서 목포를 오고가는 배가 하루에 한 편이라 저녁때에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종일 목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금은 정말 엄청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목포는 작은 항구였다. 유달산에 올라가서 삼학도도 바라보고 영산강방조제에 가서 바람도 쐬고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 뒤에 제주도 가는 배에 탔다.
제주도답사에 잊을 수 없는 일이, 선생님 아침진지로 해장국을 택시로 배달한 일과 한라산에서 야영하다 얼어 죽을 번한 일이다.
정방폭포에서 해녀들과 흥겨운 대화를 나누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화가 나시어(아마 선생님이 해녀들과 술을 계속 들고 계실 때에 내가 가서 시간이 없으니 그만 가시자고 말씀드려서 화가 나셨던 것 같다), 배가 고파서 한 발자국도 못 가신다고 그냥 길가에 주저 않으셨다.
내가 지형이더러 선생님 진지만 택시로라도 배달해 오라고 했더니 지형이가 해장국을 택시로 배달해 왔다. 선생님도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시고는 그냥 웃으며 들고 일어나셨다. 이 얘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우리는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 영실에서 야영을 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내가 야영을 하게 될 것이니 다들 모포를 준비하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도 아무도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가 한여름이었으니 추울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였다. 나는 그나마 침낭을 준비해 갔지만 선생님께 드리고 나니 덮을 것이 없었다. 다들 여름이니 설마 얼마나 춥겠냐고 생각들 했겠지만 나는 군에서 겪어봤기 때문에 높은 산에는 기온이 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대피소에서 잘 수 있게 해 놓고 남학생들은 텐트에서 자게 했더니, 대피소에 올라간 여학생들이 추워서 못 견디겠다고 남학생들이 가져 온 덮을 것을 다 달라고 했다. 가져 온 것을 보니 겨우 두꺼운 수건 정도였지만 그것을 다 걷어서 보내고 우리는 아무 것도 덮지 못한 채 텐트 속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래 위에 체육복을 입고 그 위에 청바지와 점퍼를 입었는데도 아래 위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떨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니 언제 추웠느냐는 듯이 기온이 올라갔다. 우리는 그날 백록담에 올랐다. 영희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우리는 수박을 백록담에 까지 들고 올라가서 먹었다.
선생님이 반드시 맥주를 찾을 거라는 얘기가 있어서 미리 준비했던 캔 맥주를 선생님께 드렸다. 그전 답사 때 선생님이 백록담에서 맥주가 생각이 난다고 하시어 응백이가 다시 어리목산장까지 내려가 맥주를 사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준비한 거였다.
해마다 여름방학에만 다녔던 답사를 내가 억지를 부려 겨울에도 갈 수 있게 만들었다. 내가 문리과대학 학생장에게 부탁하여 예산을 더 배정받을 수 있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때가 막 직선으로 단과대학생장을 뽑을 때라 학생장선거가 치열했었다. 생물학과 학회장이 문리과대학생장에 출마했을 적에 내가 답사비 증액을 단단히 부탁하여 겨울답사가 성사되었다.
겨울답사로 정한 곳은 보길도였다. 윤선도 고적이 있는 곳이고 또 거기는 남쪽이라 따뜻하다고 하여 추진했다. 이번에도 선생님과 김 조교, 응백이가 같이 갔고 학부 학생은 84학번 미경이와 내가 갔다. 우리는 서울에서 밤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영산포에서 내려 버스로 해남에 갔다. 대흥사 앞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는 대흥사에 갔다가 두륜산에 올랐다. 산이 보기 보다는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여학생이 둘이라면 방을 따로 얻어야할 것이었지만 전부 다섯 명이라 그냥 하나만 얻었다. 그때는 단체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방들이 다 커서 다섯이 자기엔 널찍한 방들이 많았다. 미경이는 혼자라 어려워할 만도 했지만 전혀 그런 티를 안 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또래가 아니어서 그랬을 거였다. 나는 까탈스럽지 않은 미경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대흥사에서 나와서는 완도로 가서 배를 타고 보길도로 갔다. 우리는 예송리에 자리를 잡고 민박집 주인인 문 선장에게 부탁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갱개미 다섯 마리를 준비하고 소주 1.8리터 큰 병을 하나 가지고 유람을 떠난 거였다.
배에는 문 선장과 그 후배가 타고 우리 다섯이 전부였다. 갱개미를 회로 떠서 소주를 마셨다. 술은 선생님과 응백이, 나까지 셋만 마셨는데도 바로 동이 났다. 배를 돌려 술을 더 살 수도 없는 일이라 술 떨어진 것을 아쉬워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정월대보름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나는 예송리 해변에 나가 문 선장하고 응백이와 술을 많이 마셨다. 미경이도 같이 나가서 해변에서 놀았다. 정월이면 아직 추울 때였지만 거기는 남쪽이라 그런지 체육복바람에 나가 있어도 추운 줄을 전혀 몰랐다.
4학년 여름방학 답사는 홍도와 흑산도로 갔다.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이번에도 밤에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쾌속선을 타면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곳을 우리는 일반여객선을 타고 네 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우리 인원은 열 명이었고 홍도에 먼저 갔다가 흑산도로 나오는 여정으로 했다. 선생님이 지도교수셨고 김 조교가 인솔책임자였다. 응백이는 같이 가지 못하고 73학번 재양이 형이 같이 갔다. 울릉도와 제주도에 같이 갔던 영희와 정미 그리고 83학번 미경이, 84학번 미경이가 같이 갔다.
홍도는 물이 부족해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그냥 오는 대로 다 받아서 난리였다. 숙소도 부족해서 우리 열 명이 작은 방 둘에 앉아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거기 비하면 흑산도는 아주 넓고 좋았다. 민박을 했던 집 아주머니 조카가 밤에 다른 섬에 다녀오다가 실종이 된지 15일이 지났다고 걱정을 많이 하시어 나도 같이 걱정을 했었다.
흑산도에서 나오던 날, 선생님께서 배의 선원하고 사소한 일로 다툼을 하셨다. 배에 사람은 미어지도록 탔고, 날은 뜨거워 땀이 줄줄 흐르는데서 나는 아주 난처했다. 내가 어떻게 말려서 될 일이 아니라 나는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4학년 겨울방학 답사는 나와 대학원에 다니는 79학번 학수가 선생님을 모시고 공주, 청양, 대천, 홍성으로 해서 다녀왔다. 우리는 공주에 가서는 공주대에 재직하고 있는 구중회 교수님께 대접을 잘 받았다. 물론 원님 덕분에 나발을 분 것이지만 토끼고기에 밀주로 담근 동동주를 취하게 마셨고 잠도 특급 호텔에서 잤다.
우리는 마곡사와 청양 장곡사, 그리고 외산 무량사에 들렀다가 대천으로 나왔다. 외산 무량사 앞에 있는 경희다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선생님께서 혹 경희대를 나온 분이 사장인가 물었더니, 사장 이름이 경희라고 했다. 선생님과 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경희다방 얘기를 가끔 떠올렸다.
우리는 수덕사 앞에서 자고는 아침 일찍 수덕사를 거쳐 덕숭산 정상에 올랐다. 산이 높지 않아 보여도 오르기는 힘이 들었다. 덕숭산 정상에서 보이는 사방이 내포(內浦))였다. 산에서 내려와 수덕사 여관에서 내가 처음으로 선생님께 장기를 이겨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장기판이 보이면 선생님께서는 늘 내게 장기를 두자고 먼저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장기는 대단히 센 편이어서 내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내가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은 백전백패가 아니라 전체로 이긴 적이 없다는 얘기다. 수덕사 여관에서도 솔직히 내가 이긴 것은 아니고 1승 1무 1패의 전적이었지만 선생님께서 당신은 비긴 것도 패한 것으로 치겠다고 사전에 말씀하시어 내가 이긴 것이 된 거였다.
산에 올랐다가 여관에서 장기를 두느라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이 날 중국 비행기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공습경보가 발령이 되고 군에 비상이 걸리는 난리가 났었다. 그때는 삐삐도 휴대폰도 없을 때라 우리는 그냥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상황이 종료가 된 뒤에야 알았지만 집에서는 연락이 안 되어서 무척 걱정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다섯 번의 답사를 다녔다. 그 다섯 번의 여행으로 인해 선생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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