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2012. 3. 30. 20:2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2006129일에 우리 모임이 있었다. 내가 우리 모임이라고 하면 여럿이지만 경희대 국문과 모임은 몇 안 된다. 모임을 갖지는 않지만 고주회가 있고, 강서·양천지역 국어교사 모임, 그리고 그냥 이름 없이 모이는 82학번 출신 모임이다.

 

82학번 모임은 다 나오면 나와 수명이, 선일이, 대희, 흥술이, 정숙이, 미혜 씨, 은경이, 미경이, 순희까지 모두 열 명이다. 이 열 명이 다 모인 때는 극히 드물고 보통 대여섯이 나온다.

 

이날도 수명이, 대희, 선일이, 정숙이와 순희만 나왔다. 우리는 먼저 이파네마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는 나중에 링크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더 마셨다. 나는 미혜 씨와 은경이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오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미경이는 어디 여행을 간다고 했었다.

 

수명이가 학교에서 중국 상해에 있는 자매학교에 갔다가 온 이야기를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상해에 가서 얼마나 잘 먹고 놀았는지를 얘기하는데 평소의 수명이 모습이 아니었다. 중국 상해에 있는 자매학교 교사들을 전부 술로 보냈다는 거였다.

 

수명이 말에 의하면 첫날은 남자교사들만 나와서 대작을 하더니 둘째 날은 미인계를 쓸 생각이었는지 여자교사들도 나왔으나 수명이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아 거기 교사들이 두 손을 다 들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수명이와 그 일행은 완전 칙사 대접을 받았고 34일의 여정을 끝내고 귀국할 때는 자매학교 교사들이 주신(酒神)’이라는 족자를 만들어 선물을 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졸지에 주신이 되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우리는 선생님 얘기로 흘러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신(酒神)’은 당연히 선생님이시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나만 자주 선생님을 뵈었을 뿐 다른 친구들은 무슨 행사나 있을 적에 뵈었기 때문에 선생님 근황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내가 근래에 뵌 얘기를 하면서 선생님은 지금도 술에 대해서는 대적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얘기를 했더니, 다들 한 번 뵙고 싶다고 했다. 그럼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지금 당장 전화를 해서 날을 잡자고 얘기하고 나는 바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과 1223일 토요일에 용인 민속촌 입구에서 뵙기로 약속을 드렸다.

 

1220일에 내가 수명이, 대희, 선일이에게 전화를 해서 23일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확인했더니 선일이는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고 수명이와 대희는 올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용인민속촌 입구 주요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선생님께도 그렇게 전화를 드렸다. 나는 양재동에 가서 버스를 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간신히 약속시간에 도착했다. 선생님이 나와 계셨고 대희도 막 도착하여 선생님을 모시고 주유소 부근에 있는 용갈비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수명이에게 휴대폰으로 연락을 했더니 고속도로가 많이 막혀 30분 정도 늦을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가 먼저 시작했다. 나는 지난 125일에 제천에서 있었던 호태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뵈었지만 대희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이라 나보다 훨씬 반가워하면서 이런 저런 말씀을 올렸다.

 

대희가 성남의 송림고등학교에 있다가 공립으로 옮긴 지가 몇 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바쁘게 소주 몇 병을 마시고 있을 때에 수명이가 찾아왔다. 수명이도 선생님을 뵌 지가 오래 되었던 터라 선생님께 잔을 올리고 받는 시간이 짧았다.

 

소주를 마시면서 수명이가 상해에 가서 술을 잘 마셔 중국 사람들로부터 주신(酒神)’ 대접을 받고 온 이야기를 꺼내서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은 주신은 영주가 아니냐?’ 하셔서 나는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어디 가서 크게 취해 실수한 적은 없지만 수명이나 대희에 비해 내가 더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얘기를 하던 중에 수명이가 선생님 연세를 여쭙길래 내년이 칠순 되신다고 내가 대신 말을 했다. 그랬더니 수명이와 대희가 깜짝 놀라며 언제 그렇게 되셨냐고 했다. 하기는 우리가 선생님 사십대 중반이실 때부터 뵙기 시작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그 모습이시라 연세가 드시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내년에 있을 선생님 칠순잔치 얘기가 나왔다.

 

내가 먼저 꺼낸 것은 결코 아니고 대희가 얘기했다. 선생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자는 거였다. 수명이도 좋다고 하여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술자라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선생님께 드린 말씀이라 말을 꺼냈으면 지켜야하기 때문이었다. 말이 해외여행이지 그 경비가 만만치 않을 거였다.

 

선생님은 아주 흐뭇해하시면서 해외여행도 좋지만 선생님께서 못 가본 곳이 백령도니 시간이 된다면 느덜하고 백령도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하시었다. 나는 한 시름 놓았다. 백령도라면 내가 충분히 모시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희희낙락할 적에 수명이, 대희와 가까운 78학번 종륜이가 왔다. 종륜이는 선생님을 뵙는다는 얘기를 듣고 같이 뵙고 싶어 일찍 오려 했으나 갑자기 일이 생겨 조금 늦었다고 한다.

 

나는 나보다 한 학번이 위인 종륜이를 대할 때에 늘 존댓말을 써 오던 터라 그렇게 만나니 조금 어색했지만 금방 털어버렸다. 종륜이가 온 뒤에 소주를 두 병인가 더 마시고 일어섰.

 

선생님은 술이 거나하시게 취하셔서 아주 흐뭇해 하셨다. 선생님 댁까지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택시를 불러 모시려 했으나 선생님이 걷고 싶다고 하시어 같이 걷게 되었다. 대희와 종륜이가 같이 걷고, 나는 선생님 손을 잡고 수명이와 같이 걸었다. 바람이 차갑고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그렇게 걷는 것도 괜찮았다. 선생님이 걷자고 하신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시는 것보다는 아파트 앞의 상가에 가서 한 잔을 더 하고 싶으셨던 거다. 선생님이 마신 술이 적은 량이 아니어서 조금 걱정이었지만 나도 기분이 너무 좋아서 선생님이 가시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설날에 세배를 가서는 밖으로 모시고 나간 적이 없지만 선생님을 밖에서 모시고 들어갈 때면 선생님은 아파트 앞의 상가에서 꼭 한 잔을 더하고 싶어 하셨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가려고 하다가도 선생님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시면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들어가시는 집은 조그만 횟집이었다. 실내 포장마차 수준의 횟집이지만 수족관에는 그래도 싱싱한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사장님이 선생님을 잘 알아 모셔서 늘 그 집으로만 들어갔다.

 

횟집에 들어갔으니 회를 안 먹을 수가 없어서 감성돔으로 한 접시 시켜 소주를 시켜 마시다보니 거기서도 다섯 병이나 마셨다. 내 기준으로 본다면 정말 다른 때보다 두 배 이상을 마신 거였다.

 

선생님께 이젠 취하셨으니 그만 들어가시자고 말씀드렸더니 종륜이가 맥주를 사 가지고 선생님 댁에 가 더 마시자고 했다, 선생님도 그것이 좋겠다고 하시어서 우리는 수퍼에서 1.5리터 펫트 세 병을 사고 오징어포와 귤 한 상자를 사가지고 댁으로 갔다.

 

사모님은 성당에 가시어 안 계시고 주환이만 있었다. 들어가서 맥주를 한 병 따고 주방을 뒤지어 안주가 될 만한 것을 찾아서 내놓다가 양주가 있는 것을 보고 종륜이가 양주를 한 병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이미 취한 상태여서 우리는 술맛도 모르고 양주 한 병을 반쯤 비우고 일어섰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밖에 나왔더니 어느 새 시간이 갔는지 열한 시가 넘었다고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올 생각이었으나 대희가 이왕 늦었으니 수원 자기 집에 가서 자고 한 잔 더 하자고 하여 우리는 택시를 타고 대희네로 갔다. 어렸을 때에 보았던 선나가 어느 사이에 눈이 부신 처녀가 되어 있었다. 나나, 수명이나, 종륜이나 다 남희 씨하고도 잘 아는 사이여서 많이 늦은 시간이었으나 크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대희네 집에서 대희가 아끼는 양주 한 병을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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