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0:3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선생님을 20일 출판기념회에서 뵙기로 했고, 나는 지난 3일에 선생님을 뵈었기 때문에 올 스승의 날은 그냥 넘어가려고 생각을 했다가 13일에 급히 연락을 드렸다. 내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스승의 날인 15일 여섯 시에 사조참치에서 뵙기로 한 거였다.
선생님은 20일에 만날 것인데 무얼 또 만나느냐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날이 스승의 날이라 우리가 서울로 모시겠다고 하셨더니 쾌히 승낙을 하셨다.
내가 선생님과의 창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연락을 하고 날을 잡아야만 선생님을 뵙는 줄 알고 있어서 선생님께만 연락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리를 할 사람들에게 다 연락을 해야 했다.
다른 때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지만 명색이 스승의 날이고 하니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했으면 좋겠는 사람들이 영희, 은경이, 미경이, 순희 등이었다. 내가 전화를 했더니 다들 대답이 시원치 않았고 순희만 시간을 낼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했다
여자들하고의 약속은 만날 시간에 만나는 장소에 오기 전까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남자들은 약속이 되면 다 오는 것으로 알지만 여자들은 무슨 일들이 그리 갑자기 생기는지 온다고 해놓고도 안 올 때가 많다. 그래도 늘 미련 때문에 전화를 하게 되는 것이 나만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늘 안부를 묻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임에 나가면서 선생님을 모실 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대한 사람은 70학번 인길이 형님과 83학번 기윤이다.
학교에 있지 않고 사업을 해서 늘 출장을 다니는 80학번 중기는 연락만 하면 꼭 나왔다. 중기는 내가 가끔 잊고서 연락을 취하지 않아 함께 하지 못했다고 투덜거려서 근래에는 빼 먹지 않고 연락을 했다.
솔직히는 내가 연락을 해서 어쩌지 못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연락을 하기가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나는 내가 정말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연락을 하는 거였다.
내가 출판기념회를 염두에 두고 있어 생각을 안했다가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연락을 하니까, 다들 일이 있다고 해서 결국 인길이 형님과 중기, 기윤이만 나오게 되었다.
선생님께는 전기호 교수님도 함께 나오시라고 미리 말씀드렸었다. 전 교수님은 경제학과의 교수님으로 우리 선생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시는 분이라 내가 주선하는 모임에는 언제나 같이 모셨다.
선생님이 서울에 계실 때는 국문과 강사로 재직 중인 배규범 박사가 늘 선생님을 모시고 나왔지만 선생님이 용인으로 내려가신 뒤에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오셨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는 사조참치로 갔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조금 있다가 선생님이 오셨는데 전기호 선생님은 다른 일이 있으셔서 못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인길이 형님, 기윤이, 중기가 차례로 와서 흐뭇한 자리가 시작되었다.
자리가 너무 단출해서 나는 선생님께 송구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우리 국문과 출신이 아니라도 사진클럽의 전 실장, 지은이, 경숙이와 영일고에 근무했던 여자 선생님들이라도 같이 했을 거였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 갑작스레 날을 잡았기 때문에 부르기가 좀 그랬다. 가볍게 선생님만 모시고 조촐한 자리를 하려고 한 것이지만 막상 사람이 너무 적으니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은 매우 흐뭇해하시면서 술잔을 주고 받으셨다. 나야 엊그제 뵈었으니까 며칠 안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1년에 한 번 만나는 얼굴이라 그간 지내온 일들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받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선생님은 늘 애들 건강하게 지내는 것부터 물으셨다. 예전에 우리 선배 중의 한 분이, 아이가 어릴 적에 이웃집 할머니가 준 사탕을 목에 넘기다가 숨이 끊어진 적이 있어 그 아픈 기억을 자주 하셨다. 선생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얘기가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늘 주의를 주셨다.
거기 모인 사람들 얘기가 끝나면 선생님은 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물으신다. 제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시고 기억력이 좋으시니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나는 국문과출신 사람들이 선생님의 기억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누가 내 기억력에 대해서 놀라면 나는 기억력은 머리가 아니라 관심이라고 대답을 해준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면 선생님은 담배도 태우셨다. 예전에는 꼭 ‘장미’만 태우셔서 미리 준비해 놓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종류를 가리시지 않고 남들이 피우는 것을 달라고 하시어 몇 개비를 피우셨다.
선생님은 제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셨다. 다들 선생님 앞이라고 안 피우려 하면 먼저 불을 붙여 주시거나 그래도 안 피우려 하면 선생님도 같이 안 피우겠다고 화를 내셔서 그여 피우게 만드셨다.
선생님은 닷새밖에 안 남은 출판기념회에 대해서도 말씀을 주셨다. 책을 읽어보니 아주 잘 썼더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영주가 피천득 선생을 능가하는 수필가가 될 것이라는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부끄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순희가 오지를 않아서 전화를 했더니 못 온다고 했다. 못 온다고 내게 삐삐를 쳤다는데 나는 웃옷 주머니에 삐삐를 넣어두어 소리를 못 들었다. 순희는 전화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흥이 점점 무르익었을 때에 나는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서 영희, 은경이, 정숙이 등에게 차례로 전화를 해서 선생님께 바꿔 드렸다. 직접 뵙지 못하면 전화로라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늘 바라는 것이 스승의 날이나 선생님 생신 날, 내가 가깝게 지낸 모든 국문과 사람들을 다 불러서 선생님과 잔치를 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지방은 고사하고 가까이 서울에 살면서도 한 번 만나기가 이렇게 힘이 들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우리는 각각 소주를 두 병씩 마시고 일어섰다. 선생님께 맥주를 더 드시겠냐고 여쭈었더니 그만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조금 놀라운 일이었지만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용인으로 모셔 줄 것을 부탁했다.
선생님이 가시고 우리는 맥주집으로 가서 좀 더 마셨다. 우리 화제는 선생님이 예년과 다르게 늙으신 것 같다는 거였다. 선생님께서 1차만 하시고 일어서신 적은 적어도 우리 기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세가 칠순이 되셨으니 늘 젊으셨을 때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작년과는 많이 다르신 것 같다는 걱정이 오고갔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날이 마지막일 줄은 (0) | 2012.03.30 |
---|---|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면서 (0) | 2012.03.30 |
고독의 그림자 (0) | 2012.03.30 |
지키지 못한 약속 (0) | 2012.03.30 |
강화도로 모시고 (0) | 2012.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