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면서

2012. 3. 30. 20:37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520일에 졸저 우연 혹은 인연의 출판기념회를 정동 이파네마에서 했었다. 내가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여러 사람을 초대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내가 책을 처음 만들었을 적에는 출판기념회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책을 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례적 행사가 되고 말았다.

 

내가 처음에 만든 책이사진 없는 사진이야기인데 이 책은 비매품으로 만들었다. 책 안과 겉에 비매품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 돈을 받고 팔수도 없는 책이었다.

 

생각도 못했던 출판기념회는 우리 학교 부근에서 학원을 하던 고등학교 후배 강현 선생이 주선해 주었다.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사진클럽 사람들을 초대한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던 거다. 출판기념회 날 서울클럽 회원들이 다 오시고 화환도 보내왔고, 고등학교 동창인 재진이가 꽃바구니까지 준비를 해서 조촐했지만 성황리에 마셨다. 정말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스스로 처음 출판기념회를 한 것은 2004년 여름이었다. 20047월에 나는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을 출간하고서 그 출판기념회를 814일에 했다. 그때도 처음에 생각한 것은 간소하게 드림호프에서 할까 했었으나 경후가 끝까지 이의를 달아서 창덕궁 앞 이화뷔페에서 성대하게 했다.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은 내가 어릴 적에 자라면서 겪었던 추억을 묶은 거였다. 나를 무척 귀여워했던 할아버지와 엄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내게 주시려 했던 어머니가 있어서 나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집안 얘기와 우리 고향 이야기를 쓰면서 충분히 상품성이 있을 거라 생각을 했지만 이 책도 역시 자비출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클럽에서 만난 전혜진 실장이 표지디자인을 했고, 그 사람이 소개해준 출판사에서 저렴하게 책을 내었다. 출판비가 250만원이나 들었지만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고 나중에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다 회수할 수 있었다. 염치없는 일이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The 35mm Camera는 내가 사진기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펴낸 거였다. 내가 다 쓴 것은 아니고 인터넷 등에서 찾은 자료를 활용한 것이지만 앞으로 35mm 사진기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나은 책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이 책은 인터넷사진클럽에 온(on), 오프(off)라인으로 250부 정도를 팔았다. 출판비는 먼저 것과 같았고 별 수 없이 출판기념회를 해서 회수하였다.

 

책을 만들게 되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책을 우편으로 보내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들고(책을 한 권 보내는데 1500원 정도의 우표를 붙여야 한다), 또 우체국 창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등기우편이다. 분실이 되어도 책임을 질 수 없으니 귀중한 것은 등기로 부치라고 한다(책을 한 권 등기로 보내려면 2500원이 든다). 게다가 책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하니, 그런 모임을 두세 번만 해도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어 술자리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보잘 것 없는 것을 내면서도 이러저런 핑계로 출판기념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책으로 묶어놓고 아는 사람들에게 와서 축하를 해달라고 강요를 하는 것이 내심 부끄러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출판비용을 뽑아낼 수 있으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번으로 끝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세 번이나 했던 거였다.

 

내가, 내가 낸 책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사람들을 부르는 것은 정말 얼굴 뜨거운 일이었다. 늘 마찬가지지만 내가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우선 초등학교 친구들이다. 동창과 선후배해서 마흔 명 남짓은 와준다. 그 다음이 영일고 제자들이다. 영일고에서 20여 년을 넘게 근무하다보니 내가 가르쳐서 내보낸 제자 중에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마지못해 찾아주는 제자가 스무 명 남짓은 된다.

 

그리고 영일고에서 근무하면서 가깝게 지내는 동료 교사들이 또 한 팀이다. 학교가 그래도 큰 편이다보니 교사의 숫자는 많지만 괜한 일로 다 부를 수는 없는 일이라 나는 가까운 사람들만 연락을 한다. 영일에서 이미 퇴임하신 선생님들 중에 몇 분이 계시고, 현재 같이 재직하는 교사가 또 몇 명은 되며, 계약직으로 와서 근무하다가 다른 학교로 간 교사들 중에 계속 연락이 되는 가까운 사람이 또 몇 있다. 여기서 대략 열댓 명은 자리를 함께 해 준다.

 

대학의 친구들과 후배가 여남은은 되고, 사진클럽 사람들도 열은 넘게 와주니 이렇게 해서 모이는 사람들이 백여 명쯤 된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친인척이래야 처가 식구들뿐이지만 거기서도 다 하면 열 명 가까이 돼서 매 번 백여 명이 조금 넘게 참석을 했다.

 

내가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가장 뼈아프게 남는 후회가 그 자리에 어머니를 못 모신 일이다. 사실 처음 할 때는 개갈 안 나는 책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부른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어서 어머니를 모실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그날 생각보다 성황리에 끝나고 여기저기서 들어 온 화분이 여러 개가 되어 내가 집으로 가져갔다. 그 화분들을 보시고 마침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고모님께서 큰 꾸중을 하셨다.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그런 좋은 자리에 안 모셨느냐고 한 말씀 크게 들은 거였다. 나는 솔직히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씀 드렸고 다음에는 꼭 모시겠다고 했지만 일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두 번째 기념회를 할 때는 어머니께서 낙상을 하시어 거동을 못 하시어 못 모셨고, 세 번째인 이번 기념회에는 돌아가시어 못 모셨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놓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으니,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이 바로 이런데서 나온 모양이다.

 

내가 하는 행사는 전부 제자들이 와서 준비를 한다.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내가 아끼는 몇몇 제자들은 언제 어떤 일을 하라고 시켜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볼멘소리를 한 적이 없다.

 

예전의 세근이, 환석이, 광현이, 세연이도 그랬지만 근래의 홍찬이, 종건이, 민정이, 세민이, 호성이도 그렇다. 그렇게 잘 도와주는 제자들이 있기에 내가 무슨 일이든 겁을 내지 않고 저지르고 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다 연락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꼭 와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꽤 있어도 전화를 해서 그날 시간이 있느냐고 물은 다음에 일이 있다고 하면 다른 얘기로 돌려서 혹 미안해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서 계산을 해보니 올 수 있다는 사람이 백여 명이 훨씬 넘었다.

 

선생님은 내가 출판기념회를 세 번 하는 동안 매 번 오셔서 축사를 해주셨다. 선생님께 먼저 읽어보시라고 내가 미리 책을 드리면 선생님은 글자 한 자도 빼어놓지 않고 꼼꼼히 읽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책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쓴 글은 정말 세밀하게 읽으셨다. 어떤 때는 글을 쓴 나보다 더 잘 아셔서 놀라울 뿐이었다.

 

내가 늘 내 글의 진정한 독자로 두 사람을 꼽았는데 선생님과 고향 친구인 경후였다. 나를 아는 여러 사람들이 진정으로 내가 쓴 글을 읽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다 고마운 일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선생님과 경후는 행간에 걸린 내 마음까지도 늘 읽어낸다고 확신한다.

 

출판기념회라고 해 놓고 음식만 차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경후가 얘기해서 나는 간단한 의식을 준비했다. 먼저 선생님이 축사를 해주시고 내가 인사말을 하는 정도로 끝내던 것을 이번에는 가족 대표와 제자 대표를 한 사람씩 선정해서 축사를 하게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혜경이더러 가족을 대표해서 축사를 하라고 했더니 쑥스럽다고 해서 용범이가 하기로 했다. 제자로는 멀리 통영에 가 있다가 올라 온 세근이에게 부탁했다. 언제나처럼 사회는 경후가 봤다.

 

선생님은 수원에 사는 호태가 모시고 왔다. 선생님은 조금 일찍 오셔서 여기저기 인사를 받으시기 바빴다. 이번엔 대희, 수명이, 미혜, 은경이, 석영이, 종수, 미경이 등 국문과 출신들이 여럿 와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식이 시작되어 선생님이 격려사를 해 주시고 용범이와 세근이, 금보가 축사를 했다. 부끄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와준 모든 분들이 정말 고마웠다. 간단하게 식이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자 선생님은 무척 흐뭇하신 표정으로 여러 자리를 다니시면서 인사를 나누고 받고 하셨다.

 

선생님은 국문과 제자야 다 너무나 잘 아시고, 영일고의 고참 선생님들도 많이 아시는 편이며, 내 제자들 중에도 여러 명을 아시기 때문에 어느 자리에 가셔도 환영을 받으셨다. 그래, 이 자리, 저 자리로 다니시면서 내 칭찬을 많이 하시고 술잔을 받으시며 흐뭇해하셨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 가셔도 사람을 가리지 않으셔서 누구나 부담 없이 대해주셨다.

 

이런 자리에서는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인사를 챙겨야 할 것이나 나도 여러 자리 돌면서 인사를 하느라 선생님을 모실 수도 없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 가도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내가 초대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팀들이라 자기들끼리 알아서 어울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아는 체라도 하는 것이 도리여서 나는 쉴 틈이 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복잡한 자리라 내가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면서 늘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것이 너무 죄스럽지만 이 좋은 자리에 선생님을 안 모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선생님은 내가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늘 아시기 때문에 내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배려해주셨다.

 

내가 정신이 없을 때에 호태가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