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림자

2012. 3. 30. 20:3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무슨 큰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난 겨울방학에 정리한 원고로 우연 혹은 인연이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낼 수 있었다. 내가 방학 중에 학교에 안 나가서 시간이 되다보니 먼저 내었던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의 후속 편을 내고 싶어 시작한 거였다.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지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또 정신없이 하는 편이라 방학 중에 거의 정리가 끝이 났다. 1월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이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져 글을 쓰는 데는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3월에 학교에 나가면서 출판사에 의뢰를 했더니 바로 준비가 되어서 다섯 번의 교정을 본 뒤에 4월 말에 책이 나왔다. 나는 책이 나오기 전부터 여러 가지를 생각했던 터라 519일에 출판기념회를 할 생각을 했다.

 

기념회를 하려면 음식점을 예약해야 하기 때문에 날을 잡고도 부득이하게 변경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러 곳에 문의했다가 초등학교 선배인 동룡이 형이 일하는 이파네마에서 일요일 낮에 하기로 정해놓았다.

 

날이 확정이 되었으므로 나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그날 오실 수 있을지를 확인했다, 선생님께 전화로 520일 일요일 낮에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서 출판기념회를 해도 괜찮은지 여쭈었더니 다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분이 못 오신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선생님이 안 오시는 출판기념회는 나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430일부터 우리 학교 중간고사여서 나는 그 기간에 선생님을 뵙기로 했다. 시험기간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전에 끝나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하고 시간만 맞으면 낮에도 괜찮았다.

 

내가 53일에 뵙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그날 경희의료원에 정기 검진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루를 당기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검진을 받으시고 종로로 나오시는 것이 더 나으시겠다고 하여 3일 열두 시 반에 사조참치에서 뵙기로 했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모실 때는 의례 가는 곳이 종로 사조참치이다. 예전엔 목동의 동신참치에 자주 모시고 갔지만 그 집이 문을 닫았고 한 때는 서울참치에도 모시고 다녔으나 주인이 바뀐 뒤로는 늘 사조참치로 모셨다.

 

선생님은 참치를 좋아하셨다. 선생님께서 음식을 가리시지는 않으시지만 육류보다는 어류인 참치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선생님을 모실 때는 가급적 참치집으로 다녔다.

 

3일 날, 책을 한 권 챙겨서 열두 시 반에 사조참치로 갔다. 선생님과 둘이만 만나면 조금 딱딱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몇 군데 전화를 했었지만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숙이가 사조참치에서 가까운 곳에 근무하고 있는데다가 마침 그날이 생일이어서 잠깐 나와서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더니 미리 선약이 되어 있어서 어렵다고 했다.

 

집사람더러 선생님하고 점심을 같이 먹게 나오라고 했지만 일이 있어서 못 나온다고 했다. 할 수없이 선생님과 둘이서 시작을 했다. 선생님께 먼저 병원에서 검진한 결과를 여쭈었더니 정기 검진이었고 약간의 당과 혈압이 있지만 약을 드시고 계셔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셨다.

 

낮술이었지만 선생님하고 둘이 앉았으니 짧은 시간에 처음처럼다섯 병을 비웠다. 소주는 내가 늘 처음처럼을 마시기 때문에 선생님도 나를 만날 때면 처음처럼을 마시려니 하신다. 나도 음식이나 술을 가리지 않는 편이나 소주만은 처음처럼을 마신다.

 

내가 처음처럼을 마시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늘 초심(初心)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잊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다. 다른 한 이유는 진로직원들의 불친절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충무로 부산복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에 참이슬을 홍보하기 위한 직원 셋이 들어왔다. 남자 하나와 아가씨 둘이 소주를 가지고 다니면서 직접 따라주며 참이슬을 계속 이용해 달라고 했다.

 

그때 내가 멀쩡한 상태에서 그 홍보직원을 불러, 진로가 사장이 바뀌었으니 신문광고라도 내서 그동안 애용해주신 소비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계속 애용해달라고 부탁을 해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직원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우리는 그런 것까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척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이런 정신으로 소비자를 대하는 직원들이 있으니 그렇게 마셔줘도 회사가 망하는 거라고 화를 내고는 다시는 진로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선생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도 나하고 마실 때는 꼭 처음처럼만 찾으셨다.

 

선생님하고 자리를 같이 할 때는 우리 집 애들 얘기, 국문과 얘기, 국문과 졸업생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내가 궁금한 것들을 선생님께 여쭙기도 하고 선생님이 먼저 알고 계신 것들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신다.

 

선생님과 나의 얘기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거의 한정이 되어 있지만 뵐 때마다 묻고 확인을 하는 것이 선생님과 나의 일이었다. 얘기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자기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모르고 지낼 거였다.

 

그날, 선생님은 용인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 용인시청에 가면 많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가보니 선생님하고는 맞지 않더라는 말씀이셨다. 사우나에 가보니 아픈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괜히 당신도 아픈 것 같아서 두렵고, 휴게실에 가보니 대부분 시골어른들이라 얘기가 통하지 않아서 거기 못 나가겠더라고 하셨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일어섰다. 선생님이 전기호 교수님이 계신 곳에 가보자고 하셔서 택시로 모시고 광화문으로 갔다. 선생님의 제일 친한 친구이신 전 교수님은 당시 대한민국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을 맡고 계셨는데 그 사무실이 광화문 세안빌딩 8층에 있었다. 선생님이 이미 전화를 하셔서 전 교수님을 뵐 수 있었고, 녹차를 마시고 조금 있다가 일어섰다.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지하철 1호선 시청역으로 갔다. 선생님은 강남역으로 가시기 위해서 2호선을 타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서서 선생님이 가시는 뒷모습을 보니까 왠지 쓸쓸해 보이셨다.

 

나는 다시 달려가서 선생님 손을 잡고 선생님께 맥주 한 잔만 더 하시자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을 모시고 역사 밖으로 나오려다보니 안에도 생맥주를 파는 곳이 있었다. 거기로 들어가서 500cc 한잔씩을 마신 다음에 다시 한잔씩을 더 시켰다.

 

내가 선생님께 피곤해 보인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두 번째 잔을 반쯤 드시고 일어나셨다. 나도 반쯤 남기고 일어나 다시 선생님 가시는 쪽으로 따라 갔더니, 혼자 갈 수 있으니 그냥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거기 서서 선생님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