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0:44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17일 일요일에 나는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선생님 장례 모시는 날이고, 윤정이 결혼하는 날이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내가 성남 84학번 미경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 휴대폰을 받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집전화로 했더니, 애들 아빠가 받았다. 나는 급히 전할 얘기가 있다고 미경이를 바꿔달라고 해 선생님의 부음을 전했다.
열한 시가 하관시간이니 그 시간에 맞춰 그리로 가면 장례식에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국문과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고 가서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라고 일렀다. 미경이도 많이 놀라면서 그러겠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연락을 해야 할 사람은 이제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늘은 나도 어쩔 수 없어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양쪽을 다 가자면 시간도 어정쩡하지만 괜히 나로 인해 결혼식에 누가 될까봐 조심하기로 한 거다. 결혼식에 갈 때는 상가(喪家)에 들르지 않는 것을 관습으로 지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결혼식을 주관할 내가 상가에 가서 울다가 왔다고 하면 혼례를 치루는 집에서는 꺼림칙해 할 거였다. 그것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수 있는 일이라서 결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집에서 계속 시계를 보면서 장례식의 진행절차를 생각해 보다가 열 시 반에 집을 나서 청담동 결혼의 전당으로 갔다. 날은 아주 좋아서 구름 한 점이 없는 하늘에 햇볕은 쨍쨍 내리쪼여 정신없이 더웠다.
하객이 무척 많았다. 양가가 다 첫 혼인이라 그런지 꽤 넓은 식장을 빼곡하게 채운 사람들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게다가 윤정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척 많이 몰려와서 더 시끄러웠다. 학급 아이들이 선생님 결혼식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우리 학교에서는 오치훈, 유재량 선생이 왔고, 졸업생 몇 명이 와서 축하를 했다. 이윽고 결혼식이 시작 돼서 순서에 따라 식을 진행하여 잘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신랑가족석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일찍 일어서 집으로 왔다. 몸이 너무 피곤하여 집에 오자마자 그냥 쓰러져 잠을 잤다. 아마 두어 시간을 자고는 일어난 것 같다.
오늘 장례식이 궁금해서 규범이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내가 못 갔으니 제가 전화라도 해서 장례식 분위기와 절차, 마무리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으면 했으나 그 사람도 장례를 치르느라 연 사흘을 정신없이 보냈으니 지금쯤 골아 떨어져 잠을 잘 것 같았다.
가까운 사람 중에서 오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영희밖에 없을 거였다. 영희가 첫 날 왔다가 늦게 가면서, 어제는 일이 있어 못 온다고 했고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영희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영희는 내가 묻지 않아도 줄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소상하게 얘기를 했다.
영희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일면 동조하기도 하고, 일면 변명도 하면서 한 30분이 넘게 통화를 했다. 내가 못 갔으니 그래도 와서 일을 치룬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할 처지도 못 되었다. 또 일을 처리하다보면 절차상의 문제도 있기 마련인데다가 장례식은 경험해 본 사람들이 아니면 매끄럽게 처리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영희는 나중에는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었다. 여러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은데다가 이제는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더 속이 상했을 거였다. 영희는 선생님하고 나하고는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내가 저녁을 먹고 나서 생각하니 지난 사흘이 무척 긴 시간 같았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았다. 급작스레 돌아가는 분들이 많다고도 하고, 또 주변에서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지만 선생님의 별세는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다.
지난 주에 내가 선생님을 뵈었을 때만 해도 건강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셨다. 약간의 고혈압이 있기는 했지만 정기적인 검진을 받으며 병원의 처방에 의해 약을 드시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도 대머리인 것만 제외하면 연세보다 훨씬 젊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또래하고 같이 술을 드셔도 조금도 밀리거나 빼지 않으셨고, 규칙적으로 등산을 하시어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체력을 가지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 정말 실감나지 않았다.
선생님과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나는 선생님하고 1982년에 만나 1983년부터 엊그제까지 만 23년을 행복한 만남으로 보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 누가 뭐래도 선생님은 나의 선생님이셨고, 나는 선생님의 수제자였다. 내 스스로 감히 수제자라고 말을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선생님에게 자랑스러운 제자였다고 확신한다.
내 비록 국문학 박사가 되지 못하고 교육학 석사에 머물렀고, 교수가 아닌 교사밖에 못 되어 대학이 아닌 고등학교에 몸담고 있지만 한 번도 선생님께 부끄러운 적 없었고, 선생님은 이런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고 자신한다. 나는 선생님의 제자인 것으로서 족하였고, 선생님은 나의 스승으로서 자랑스러웠다.
금봉 고경식 선생님, 선생님은 내게 가장 좋은 스승이셨고, 아버지였으며,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나는 감히 선생님하고 지음지기(知音知己)였다고 자신한다.
선생님은 한 마디로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이 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이셨다. 80년대에 경희대를 나온 사람 중에서 국문학과 고경식 교수를 모르는 학생이라면 그는 경희대졸업생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90년대에 학생처장으로 재직하신 적이 있지만 학생처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국문과 고경식 교수셨다. 선생님은 어떤 제자나 학생을 대해도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스승이셨다.
선생님은 따뜻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격한 분이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그런대로 너그러웠지만 학생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 제자에게는 꾸지람을 아끼지 않으셨다.
학생들이 선생님 앞이라고 담배를 피우지 못할까봐 자리를 피해주시거나 아니면 선생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라고 불을 붙여 주셨다. 나는 지금도 제자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곱게 보지 않지만 선생님은 그런 격식을 차리지 않으셨다.
또한 제자에게는 정이 넘치는 스승이셨지만 늙어서까지 스승에게는 깍듯한 제자였다. 경희대 국문과의 은사이신 박노춘, 황순원 교수님에게는 물론 선생님 대학시절의 조교로 있었던 서정범 교수님에게도 깍듯이 스승으로 모셨다.
서 교수님이 전화를 주시면, 늘 부동자세로 ‘예, 경식입니다’ 해서 곁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었다. 나는 늘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싫었지만 감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늘 담배를 권하셨어도 어른(스승님)들 앞에서는 담배를 절대 꺼내지 않으셨다.
사람이 상처를 입는 것은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에게서 일 때가 더 많다. 같은 과의 선생님과 오랜 시간 갈등을 많이 했지만 한 번도 제자들 앞에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제자가 취업문제로 찾아오면, 가리지 않고 먼 길이라도 같이 가 주셨으며 제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취업을 시킨 제자 중에 과연 몇이나 선생님을 찾아뵈었던가?
대부분 자기 어려울 때면 선생님을 찾아와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잊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요, 제자들의 마음가짐일 거였다. 오랜 시간을 선생님 곁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아왔던 내 생각으론 선생님이 참 바보처럼 느껴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을 배신하기보다는 배신을 당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인데 어찌 가슴 아프고 속이 상하지 않았으랴. 나는 선생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같은 길을 고스란히 따라고 있으니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선생님은 이제 다시는 휴머니스트가 나오지 않을 이 세상에 어떤 위대한 국문학자와도 비견할 수 없는 휴머니스트요, 어느 저명한 교육자보다도 뛰어난 휴머니스트였다. 휴머니스트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알며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비록 선생님께서 학문적 성과로 높은 이름을 날리지 않았고, 교육자로 대단한 명성을 남기지 않았어도 따뜻한 인간애(人間愛), 그것만으로 충분하셨다. 선생님은 남을 걱정할 줄만 알았지 사랑을 받을 줄은 모르는 따뜻한 바보였다.
휴머니스트는 따뜻한 사람이다. 선생님은 진실로 따뜻한 분이셨다. 이제 선생님은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마지막 전설로 남아 계실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늘 선생님께 우리 아이들 잘 가르쳐서 내가 못 이룬 것을 할 수 있게 할 거라고 말씀 드렸었다. 나야 선생님께 못난 제자지만 내게는 자랑할 만한 제자가 많아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록 교사가 되었지만 스스로 만족했고 우리 제자 중에는 크게 성공하는 아이가 여럿 나오리라 믿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해도 내 제자가 성공하면 나는 선생님께 떳떳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또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자신하는 얘기를 기꺼이 믿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께 내가 아끼고 자랑하는 제자들의 성공을 조금이라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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