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0:5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빈소에서 나오니 김진영 교수님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신다. 나도 또 눈물이 나왔다. 여기 저기 낯이 익은 얼굴들에게 눈인사로 대신하고, 안내 자리로 가니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내가 너무 오래 울고 있어서 다들 나를 본 모양이다.
규범이가 얼른 따라와서 내게 인사를 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내가 물었더니, 대학원생들이라고 한다. 규범이가 접객실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을 이따가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상진이 형님만 눈에 보였다.
국문과의 교수라면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이 김진영, 김재홍, 김기택, 이미원, 최상진, 김종회, 이화형, 김중섭, 이정재, 안영훈 교수 등인데 눈에 보이는 사람은 김진영 교수님과 상진이 형님, 중섭 선배, 영훈이였다. 내가 국문과를 떠난 지가 벌써 20년이 넘은 터라, 아는 사람들을 만나도 주저했었지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규범이에게 안 보이는 교수들에 대해 물었더니, 종회 형은 미국에 갔고, 정재 형은 안식년이라 쉬는 중인데 어디 외국에 갔다고 하고, 화형이 형은 중국에 가 있다고 한다. 원,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제자들인 교수들은 다 한국에 없다니…….
내가 믿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규범이 뿐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제 선생님께서 서울에 친구를 만나러 가셔서 친구분과 술을 드시고 용인 선생님 댁 앞에 오시어, 아파트 입구에 있는 상가 횟집에서 한 잔만 더 하시고 들어가신다고 집에 사모님께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그때가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열두시가 다 되도록 안 오시어, 사모님이 횟집 앞으로 나갔더니 선생님이 곧 들어가신다면서 먼저 들어가라고 하시어 사모님은 집으로 오셨다. 잠시 뒤에 선생님이 들어오시어, 술을 드시고 오시면 늘 하던 것처럼 거실 소파에 앉으셨다가 깜박 잠이 드셨다.
아침에 우리가 출근할 시간이 되어서 사모님이 우리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나서도 선생님이 소파에서 일어나시질 않으시길래 선생님께 가서 일어나시라고 말씀을 했다. 아무 반응이 없으셔서 놀라 흔들어보니 움직이질 않으셔서 바로 119에 전화를 했다.
119에서 구급차가 와 선생님을 살펴보시더니 벌써 운명하셨다고 했다. 사모님이 놀라 규범이에게 전화를 했고 규범이가 선생님 댁으로 가서 경희의료원에 연락을 하고 병원으로 모셔왔다.》
이게 전부였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서 선생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여기에 올 때까지 선생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었다.
선생님이 광장동에서 용인 민속촌 앞으로 이사를 하신 뒤에는 더 외로워하시는 것 같아 내가 술자리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지난 주 목요일에도 민속촌 앞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소주 여러 병을 비웠었다.
선생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제 서울에 오셔서 술을 드신 것이 아니라 그냥 댁이었더라면 아무래도 선생님 돌아가신 일에 대해 내가 혐의가 가장 짙다고들 얘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규범이에게 선생님의 부음을 어디까지 전했냐고 물었더니, 국문과동문회에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래 선생님 돌아가신 일을 문자메시지로 보내고 끝이라니…….
아무리 퇴직하셨다고 해도 이런 일은 국문과학회실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닌가? 일일이 전화를 하고 확인을 해도 부족할 것인데 달랑 문자메시지만 보내놓고는 앉아 있다니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일처리를 이렇게 한단 말인가?
정말 하는 짓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는 내가 나설 곳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선생님을 존경하고 잘 따르는 제자라 해도 나는 단지 국문과 졸업생의 한 명일 뿐이고, 또 선생님의 장례를 내가 주관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얘기가 안 되는 거였다. 나와 선생님은 그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을 뿐, 나는 국문과 교수도 아니고 국문과동문회의 책임자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긴 해도 지금 하는 일처리는 대학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유족이래야 사모님과 이제 갓 서른을 넘기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와 주환이 뿐인데 장례식에 관한 절차는 모두 국문과에서 맡아서 해야 옳지 않겠는가?
빈소에 분향만 하게 되어 있어, 내가 규범이에게 술잔과 술을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선생님이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약주를 좋아하셨으니 약주를 올리고 싶어 할 조문객도 있을 거였다. 아니 나부터도 약주를 한 잔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퇴주그릇과 청주 한 병, 잔대와 잔이 준비가 되어 왔길래 내가 먼저 한 잔을 올렸다.
하나하나 상황판단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시간은 자꾸 흘러 저녁이 되었다. 경희대학교에 근무하는 제자들과 직원들의 조문이 줄을 잇고, 경희학원에 재직 중인 국문과출신 교사들도 연이어 왔다.
시간이 깊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대부분이 국문과 졸업생이었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혹 내게 와 인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알아보지 못한 동문들도 꽤 있었다.
나는 밥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소주만 마셨다. 나보다 윗사람이 오면 자리를 비켜 주면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아는 사람들을 보면 잔을 권하고 잔을 받았다.
내가 국문과 선후배를 남들보다는 꽤 많이 안다고 하지만 주로 아는 사람들이 79, 80, 81, 82, 83, 84학번 정도이고, 한참 선배들 중에 경희학원(경희중, 여중, 고, 여고)에 근무하는 동문들과 내가 대학에 다닐 적에 박사, 석사과정을 다니던 선배들을 알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영희가 오고, 은경이가 오고, 순희도 오고, 미경이도 와서 82학번 동기들이 꽤 많이 모였다. 빈소에 와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82학번의 영회와 은경이, 순희 등은 졸업을 한 뒤에도 선생님과 특별한 관계로 이어온 터라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들이 올 때 마다 같이 울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뒤편에는 81학번들이 몇 있었다. 나하고 같이 있는 운선이가 같은 학번인 계수씨와 같이 왔고, 선생님을 모실 때에 늘 같이하는 제정이, 준모와 그밖에 이름이 잘 기억 안 나는 그들 동기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밤 열시가 넘을 무렵부터 사람들이 줄기 시작해서 국문과 동문들만 보였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73학번 재양이 형, 77학번 관식이 형을 만났다. 내가 대학에 다닐 적에 아주 가깝게 지냈던 선배들이다. 언뜻 알아보지 못한 76학번 재형이 형, 억관이 형, 77학번 난주 형들과 만나 술잔을 나누었다.
78학번인 덕규 형은 여러 차례 만났어도 이상하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또 실수를 했다. 영수 형은 우리 학교 근처의 학교에 있기 때문에 가끔 봐서 잘 알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78학번 형들은 얼굴과 이름이 따로 기억이 돼서 미안했다.
서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이렇게 국문과의 선후배가 함께 모일 자리가 어디 또 있으랴? 이 자리가 선생님 고희연(古稀宴)이라면 얼마나 흥겹고 흐뭇한 자리일까?
내가 슬픔에 취해, 술에 취해 정신없어할 적에 옆자리에서 젊은 여자가 인사를 하는데 누군지 몰라봤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83학번 진경이라고 한다. 이런, 내가 진경이를 몰라보다니……. 대학 다닐 적에 친동생처럼 지냈던 진경이다.
은경이, 은덕이하고 셋이 나를 얼마나 따라다녔던가? 방학이면 편지도 많이 주고받았지만 진경이가 좌파로 가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졸업하고 처음 본 거였다. 그 자리에 83학번인 성숙이와 김석영이 종수, 기윤이, 윤석영이 등 여럿이 앉아 있었다.
두 석영이와 종수, 기윤, 호태는 고주회의 주축으로 얼마 전에도 선생님을 같이 뵌 적이 있다. 그때 앞으로 선생님을 자주 모시자고 얘기했는데 바로 선생님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대하게 될 거라고는 다들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다.
열한 시 가까이 되자, 이젠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서 주로 82학번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기태, 성수, 시만이, 명환이, 제열이, 이현주, 김현주, 현희, 미경이, 윤숙이, 경숙이, 미선이, 봉일이 그리고 은경이, 영희, 순희와 그들과 같이 공부를 한 79학번 흥술이가 죽 둘러앉았다.
나는 79학번이지만 82년에 1학년으로 복학을 하여 82학번과 4년을 같이 공부했다. 그러니 내 대학생활은 82학번과 같이 한 거였다. 내가 나이가 좀 많아서 복학을 했고 또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82학번 사람들과는 얽히고설킨 것들이 많았지만 이미 다 지난 세월이었다. 흥술이는 2학년 때에 복학을 해서 같이 졸업을 했다.
82학번을 만나니, 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졸업하고 처음 만난 사람도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82학번들은 특히 우리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였었다. 82학번 지도교수가 우리 금봉선생님이셨기 때문이다. 나는 만나서 반가워 웃다가, 선생님을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나서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정신이 없었다.
난 솔직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에도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았다.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어머니는 천수를 다 하시고 돌아가셨다고 받아드려서인지 그렇게 서럽게 눈물이 나질 않았다. 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적에도 눈물을 별로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82학번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미안하다. 나는 나 혼자만 선생님을 잘 모시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들 만나고 보니, 다들 연락해서 같이 선생님을 모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든다. 많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한 거였다.
우리가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적에, 79학번인 응백이가 와서 얼굴을 비쳤고, 역시 79학번인 일구는 왔다는 말을 들었으나 보지는 못했다. 79학번 덕순이도 왔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얼굴을 보진 못했다. 늦은 시간이고 다들 바빴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후배들이 있는 자리에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열두시가 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내일 다시 오려면 집에 가서 쉬는 것이 낫겠다고 하여 같이 일어났다. 사모님께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씀 드리고 밖으로 나와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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