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간은 가고

2012. 3. 30. 20:4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나는 휴일에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오랜 습관이라, 어제 늦게 잤다고 늦잠을 잘 수는 없었다. 쉬는 토요일이 아니라서 학교에 가는 용범이 때문에 나도 평소의 토요일처럼 일어나 아침밥을 먹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면서 집사람더러 저녁 때 용범이를 데리고 조문을 오라고 일렀고, 지금 많이 피곤하니 조금 자다가 일어나서 빈소로 가겠다고 얘기했다.

 

어제 학교에서 나올 적에 오늘 학교에 못 나간다고 교감선생님께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나는 바로 경희의료원으로 가면 되었지만 어제 많이 마신데다가 잠이 부족하여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날까 생각을 하다가 이른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일어났다.

 

나는 택시로 경희의료원까지 갔다. 도착시간이 열한시가 조금 덜 된 때였는데 입관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미사를 드리는 곳에 가서 조금 서서 보다가 올라갔다.

 

선생님 빈소에 올라가니 어제부터 일을 보고 있던 대학원생들만 몇이 있고 적막했다. 내가 영전에 분향을 하고서 보니 어제 갔다가 놓았던 주전자와 잔이 치워져 있었다. 아마 선생님이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치운 것 같다. 밖에서 일을 보는 대학원생들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오전이라 그런지 조문을 오는 사람도 없어 조용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혼자 앉아 있기도 그래서 입관실과 빈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미혜 씨에게 선생님의 부음을 전화를 전했더니, 오늘 군에 간 아들 면회를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조문을 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선일이가 연락이 안 된 것 같아서 다시 휴대폰에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아서 선생님의 부음을 음성메시지로 남겼다.

 

어제부터 계속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 된 사람이 84학번 미경이었다. 집의 전화로 해도 안 받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거기도 궁금했다.

 

뜻밖에도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 대희가 왔다. 대희는 학교에서 애들 데리고 청계천에 왔다가 애들 보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대희가 분향을 한 뒤에 선생님 돌아가신 경위에 대해서 내가 얘기를 했고, 얘기를 듣고는 대희가 어처구니없어 했다. 지난 12월 말에 용인에서 대희하고 수명이, 종륜이와 넷이서 선생님을 모시고 얼마나 많이 마셨던가? 불과 6개월도 안 된 일이다.

 

열두시가 다 되어 입관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올라왔다. 어제 왔던 사람들 중에 선생님 친인척과 처가 쪽 얼굴들만 보이고 국문과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가장 바쁘게 움직인 규범이만 정신없었다.

 

규범이에게 어제 영전 아래 놓았던 주전자와 잔을 챙겨다 놓으라고 얘기했다. 사모님은 선생님 영정 앞에 술잔을 놓는 것이 마음에 안 드실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생전에 좋아하신 술이니 선생님 친구들이 오시면 그래도 한 잔 올릴 수 있어야 될 것 같아서였다.

 

열두 시 반쯤해서 82학번 희운이가 왔다. 희운이도 졸업하고는 처음 만난 거였다. 내가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얘기해 대희하고 희운이랑 셋이 경희의료원 앞으로 나와 냉면을 먹었다. 희운이가 83학번 후배하고 결혼하여 금곡에 산다는 얘기는 선일이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바로 이웃에 살았다고 하는데 선일이가 금곡에서 나와 그 뒤로는 얘기를 못 들었었다.

 

다들 너무 뜻밖이라는 얘기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희운이는 일이 있다고 가고, 나하고 대희는 다시 빈소로 갔다.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80학번 병무하고 형국이가 조문을 왔다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선후배들하고 안면이 많지만 대희는 조금 꺼리는 편이어서 그런 자리에 가도 나하고만 얘기를 하게 된다. 그쪽에 가서 조금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대희가 있는 곳으로 왔더니, 83학번이면서 경희대 국문과에 교수로 재직 중인 영훈이가 와 있었다.

 

영훈이는 어제 밤에도 밤을 새우고 갔다는데 그래도 일찍 나온 거였다. 셋이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대희하고 영훈이가 꽤 마셨다. 나는 어제 많이 마신 것이 힘들어서 조금씩 마시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내가 괜히 많이 마시고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지 않겠는가? 두 시가 조금 넘어서 79학번 학수가 왔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오래 시간 선생님과 거리를 두고 지내더니 돌아가신 뒤에야 오다니…….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희에게 수명이가 안 왔다고 했더니, 대희는 술이 취한 목소리로 일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지 꼭 와야 하느냐고 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명이는 꼭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 말도 서운한 얘기였다.

 

선일이는 연락이 안 되는 것을 보니 혹 해외 출장이라도 갔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있으면서 어떻게 안 와도 된단 말인가? 선생님은 단순히 대학 때의 교수가 아니라 우리에겐 둘도 없는 스승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무정한 얘기를 쉽게 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하기는 누구나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희가 간 뒤에 영선이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조문을 다녀가는 것이 예의라고 하면서, 반드시 와야 하는 것은 아니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했다. 내 방식대로 무조건 와야 한다고 강요하면 괜한 부담이 될 것 같아서였다.

 

저녁때가 되면서 사람이 조금씩 늘기는 했으나 어제보다는 현저히 적었다. 규범이에게 국문과 동문들 말고는 어떻게 부음을 알렸냐고 했더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규범이를 탓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국문과 동문들에게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서 말았단 말인가?…….

 

내가 처음부터 나서서 할 일은 아니었지만 내 책임이 크다. 아무리 학교를 떠났다고 해도 선생님 일이라면 내가 손을 걷어 부치고 대어들었어야 하는데 괜히 잘난 척 한다고 할까봐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된 거였다. 선생님 수첩이라도 가져다가 다 전화를 드리고, 국문과 동문명부가 아니라 경희대 동문명부를 가져다가 연락을 했어야 하는 것을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이제 내일 있을 장례절차가 얘기되었다. 나는 내일 못 나온다고 미리 못을 박았다. 다들 의외라고 받아들이는 눈치였지만 내일은 내가 주례를 서기로 되어 있어 못 온다고 했다.

 

나더러 아침에 왔다가 갈 수 없느냐고 했지만, 주례를 서러 가는 사람이 아침에 상가에 들렀다가 가면 결혼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 분명하고, 또 나도 아침에 여길 들러서 울다가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대신할 사람이 없다면 모르지만 다들 알아서 하는 일에 굳이 얼굴을 비치기 위해 올 일은 아니었다. 상진이 형님, 중섭 선배, 영훈이, 규범이 등 국문과 사람들과 선생님 친가, 처가의 사람들이 상의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 쪽으로 비켜섰다. 그러는 중에 집사람이 용범이를 데리고 조문을 왔다.

 

내가 같이 들어가서 용범이게 분향을 시키고 절을 시켰다. 용범이는 어렸을 적에 선생님 댁에 세배를 두어 번 같이 갔었다. 용범이가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얼마나 반갑고 귀여워해주셨던가? 혜경이는 딸이라서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용범이는 꼭 와서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사람이 사모님과 손을 잡고 울다가 인사를 하고 먼저 갔다. 나는 열두시쯤에 가겠다고 일렀다.

 

집사람이 간 뒤에 영선이가 왔는데 빈소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다고 겁을 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일이다. 예전에는 시신을 집에 모셨지만 요즘은 거의가 다 시신을 장례식장에서 모시고 빈소를 차리기 때문에 조문을 가는 사람이나 일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해졌는가? 영선이더러 정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으면 그냥 가라고 했더니 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를 따라 들어가서 분향을 하고 갔다.

 

83학번 미경이가 온다고 하고 오질 않아서 전화를 했더니, 일이 늦어져서 아홉 시가 넘어야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갈 때까지는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내가 없으면 아무래도 낯설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 82학번 성호, 영운이 진해가 왔다. 어제 왔던 시만이도 와서 같이 자리를 했다. 성호는 작년인가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영운이는 영운이 결혼식에서 보고 처음이고 진해는 대학 졸업한 뒤에 처음 만났다.

 

우리가 앉은 뒤에는 역시 82학번인 정원이 기석이가 다른 후배들하고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선생님만 뵐 수가 없다는 것이 또 눈물을 나게 했다.

 

진즉에 한 번 모여서 자리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얘기 끝에 다들 나더러 형이 나서서 일을 주선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어제부터 많이 듣던 얘기다. 하지만 82학번 모임에 79학번인 내가 왜 나서서 주선한단 말인가? 나는 그냥 인사치레로 들었다.

 

열한 시가 거의 다 돼서 83학번 미경이가 왔다. 내가 안내해서 분향을 시키고 사모님께 인사를 올리게 했다. 미경이는 나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미경이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시 분향을 하고 5분쯤 곡을 하다가 일어났다. 이젠 정말 선생님과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잘은 모르지만 사모님 말고는 내가 가장 많이 울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 콧물을 닦고서 사모님께 내일은 못 온다고 인사를 드렸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씀 드리고서 규범이에게 선생님 잘 모시고 와서 만나자고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규범이에게 미루는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규범이는 내가 졸업한 뒤에 선생님을 모셨던 수제자였다. 솔직히 선생님이 안 계신 마당에 나는 규범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차후 문제였다.

 

미경이와 밖으로 나왔다. 미경이네 둘째 수아가 놀다가 얼굴을 다쳐 몇 바늘을 꿰매야 돼서 지금 경희의료원 응급실에 와 있다고 했다. 응급실까지 미경이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미경이가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응급실에 갔더니 미경이 둘 째 동생 문수가 같이 있었다. 오래 전에 보고 못 만났지만 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수아 손을 잡아주고는 간다고 나왔더니 미경이가 쫒아 나와 내 손에 차가운 음료수 병을 쥐어 준다. “형 너무 힘들었을 테니 집에 가서 조금 쉬세요.” “그래 고맙구나.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하고 나와서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막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