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목(果木)

2012. 3. 28. 19:35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과목(果木)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 나를 경악케하는 것은 없다

 

경희대 국문과 82학번으로 입학을 한 학생은 78명이었다. 그전까지는 한 학년에 40여 명이 입학을 했으나 갑자기 졸업정원제가 시행이 된다고 학생 수가 왕창 늘어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졸속으로 졸업정원제를 시행하겠다고 대학의 입학 정원을 늘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경희대 국문과는 한 학년에 40명 정도의 학생을 받다가 갑자기 늘어나 졸업정원 60명에다가 30%의 학생을 추가해서 78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무척이나 황당한 일이었다. 학급당 학생 수가 많았다고 하던 당시에도 중ˑ고등학교의 한 반에 70명 이상이 되는 곳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졸업정원으로 끝까지 갔다면 입학한 학생 중에서 30%는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었겠지만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제도였다. 이미 등록금을 다 내고 공부를 했으니 어떻게 학점을 안 주고 또 졸업장을 안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1982학년도 1학기에 국문과로 복학을 했고, 2학기에 78학번 수명이가 복학을 했다. 입학을 한 뒤에 바로 휴학을 한 학생도 있고 군에 간 학생도 있어서 그 숫자는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2학년 때에 79학번 흥술이가 복학했다.

 

나는 비록 82학번이 아니지만 그들과 처음부터 같이 시작해서 78명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27년여의 세월 속에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도 여럿이라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78명이 다 졸업한 것은 아니다.

 

고진웅, 구은정, 김기태, 김맹후, 김미화, 김미희, 김석주, 김성수, 김수남, 김시만, 김우곤, 김은경, 김정숙, 김제열, 김진해, 김현수, 김현주, 김현희, 나명환, 남상룡, 노희운, 문기석, 문종석, 박광진, 박영운, 박선규, 박정숙, 배영실, 백상열, 성영옥, 신동수, 신상임, 안상일, 양은미, 양혜송, 오병일, 위미경, 윤미혜, 윤용철, 윤응용, 이광혜, 이권우, 이남희, 이동민, 이동희, 이명숙, 이미선, 이봉일, 이성일, 이성호, 이영희, 이윤미, 이정원, 이행배, 이현주, 임재만, 임태구, 임호섭, 장정미, 전윤숙, 정선학, 정성욱, 정정식, 조경숙, 조순희, 조용석, 채병환, 최대희, 최문선, 최선일, 최애숙, 최주리, 한기엽, 한만선, 홍승주, 홍향기, 황숙희, 황호원, 이영주(79), 곽수명(78), 문흥술(79)

 

이중에는 내가 가깝게 지낸 학생도 있고,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은 학생도 있지만 지금은 40대 중반을 넘었을 나이니 학생이라는 말이 무색하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복학해서 아주 어색해하는 나를 가장 먼저 반겨 준 아이가 순희였다. 말을 버릇없이 한다고 내가 한 때 좋지 않게 보기도 했지만 군에서 갓 제대한 이방인을 그래도 따뜻하게 대해 준 순희는 지금도 가깝게 지내는 몇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나도 국문과 학생이긴 했지만 거의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남들처럼 문학에 정열을 태우는 사람도 아니었고, 시나 소설을 쓰기 위해서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국문과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82학번 아이들 중에서 제일 먼저 휴학한 학생이 수원에서 재수하고 들어온 이동희였고, 가장 먼저 세상을 뜬 친구가 채병환이었다. 병환이는 시를 잘 썼다고 들었는데 얼굴은 검고 점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름 방학을 하던 날 국문과 학생들이 대거 양수리로 놀러 갔는데 거기서 그만 익사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날 고향으로 바로 내려가느라 양수리에 같이 가지 못했고 나중에 서울에 와서 그 소식을 들었다. 대희가 연락을 해서 개학을 이틀인가 앞두고 용미리 공원묘지로, 대희하고 미혜 씨, 영희와 병환이하고 친했던 상열이와 그 친구들 몇이 갔었다.

 

젊은 사람을 화장(火葬)을 하지 않고 묘를 썼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병환이 묘 앞에서 목을 놓아 우는 그 누님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이른 나이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나중에 국문과 학생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당부했다.

 

남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군에 입대하거나 휴학을 해서 끝까지 같이 다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늦은 나이에 들어 온 정식이 형과 선일이, 대희가 늘 같이 다녔고 나중에 복학한 수명이와 2학년 때 복학한 흥술이가 주 멤버였다. 하긴 4년을 다니면서 78명과 다 가깝게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니던 중간에 학교를 그만 둔 사람도 몇 있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선규와 상일이다. 선규는 경북 어디인가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다가 대학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나중에 군에 갔다가 복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상일이도 경북 상주 출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1학년만 마치고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지 두 달이 채 안 돼서 복학을 했으니 군대에서 하던 말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버릇없이 행동하는 아이들이 늘 눈에 거슬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지만 그 당시의 내 사고가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거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강한 편이어서 취향에 맞는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지만 잘 맞지 않는 사람과는 인사도 않고 지냈다. 나는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척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를 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내가 대학에 다닐 적에는 학과 행사라면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고 동문행사에도 늘 심부름을 도맡아 했지만 언젠가부터 서서히 멀어져서 지금은 국문과 동문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을 하면 무책임한 얘기일 것이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 아니 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국문과 동문회에 나가지 않다보니 82학번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솔직히 궁금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일부러 찾아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다보니 다들 점점 멀어졌고 관심도 시들해졌다.

 

선생님이 계시면 내가 선생님 칠순이나 팔순 잔치를 열어서 82학번을 다 불러 놓고 며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이젠 국문과 82학번을 묶고 있던 고리가 끊어졌으니 그런 기회도 생각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박성룡, 과목(果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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