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9:26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 쏟아지는데.
1982년에 있었던 잊지 못할 사건이 대학이전 반대 시위였다. 2학기 중간고사 무렵에 발생한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에 88올림픽을 앞에 두고 경희대학교는 몇 개 단과대학을 수원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었다.
경희대는 이미 공대와 산업대를 수원으로 이전하는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재단에서는 몇 개의 단과대학을 수원캠퍼스로 더 이전하고 정부로부터 다른 수혜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도 나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도서관에 학생들이 꽉 차서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나 그날은 자리가 텅 비어 띄엄띄엄 앉은 학생들만 보였다. 그러나마나 내가 책을 펴고 앉아서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대희가 찾아왔다.
대희 말이 지금 모든 학과가 시험도 다 거부하고 시위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대희를 따라 나갔더니 문리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백여 명의 학생들이 보였고 그 대열을 떠나서 또 수백 명의 학생들이 여기저기에 진을 치고 구경하고 있었다.
대열을 정리해 앉은 학생들과 수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 사복 전경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나는 상당히 어정쩡한 모습으로 문리대 앞으로 갔다가 거기서 우리 과 아이들을 만났고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게 되었다. 분명 반정부시위는 아니었다. 학교 이전에 관한 학교 측의 책임 있는 해명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총장이 나와서 대학 이전문제를 명확하게 해명해 주기를 바란 거였다. 이것이 학교 측에 잘못 전달이 돼서인지 안치열 총장님이 나오셔서는 학생들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나무라서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나도 무척 실망스러웠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멋진 노신사가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태도를 갖나 싶어서였다.
총장님이 나와서 답변을 한다고 기대를 하고 있던 시위학생들이나 구경을 하던 학생들 모두 실망이 컸다. 그러니 성의 있는 답변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이 그냥 일어설 리가 만무했다. 기대가 무산되면 실망이 더 커지는 법이다. 이젠 학생들이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까지 외치며 점점 대열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마다 사복 경찰과 소위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시위해산 전담반이 상주하고 있을 때였다. 경찰은 학생들이 모이기만 하면 최루탄을 쏘아대고 바로 병력을 투입하여 검거하고 청량리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날은 반정부시위가 아니어서 진압부대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주고 자진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가도 그대로 있으니까 갑자기 포위작전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는 전경들을 피하느라 여기저기로 달아나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 하는 사이에 대열은 다 흩어지고 모두 후문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나야 그 대열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서 있으려 했으나 걸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붙잡아 가는 것을 보고 안 잡히려고 나도 후문 쪽으로 뛰다보니 옆에 우리 국문과 미희가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미희 손을 잡고 뛰었으나 이미 후문이 막혀 있었다. 문을 뛰어 넘으려 했지만 문의 높이가 내가 뛰어 넘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붙잡혀 가는 줄 알았더니 내가 미희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열어주어 그대로 나갈 수 있었다.
내가 붙잡혀 갔으면 하루 쯤 자고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반성문을 써야 했을 것이나 그렇게 나올 수 있어서 아주 다행이었다. 나는 후문에서 외국어대 근처까지 미희 손을 잡고 내려와서는 거기서 헤어졌다.
그 여파로 학교가 며칠 쉬었다. 솔직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일에 목숨을 걸 일도 아니고 나는 교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으로 믿는 사람이라 그 시위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내가 미희 손을 잡고 뛴 것은 내게 의미가 크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여자 손을 잡은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녀공학인 초등학교 때도 여자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여자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미희를 좋아하게 되었다. 미희는 충북 제천이 고향이고 재수를 한 아이였다. 미희는 이미자 노래를 아주 잘 불렀고 재수를 하고 들어와서인지 다른 여자애들보다 조금 조신하게 행동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학에 복학하기 전에는 여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는 편이었고 대학에 들어와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사람은 순희가 유일했으나 이 사건이 미희와 가깝게 만들었다.
나는 방학을 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가서 겨울을 집에서 보냈다. 나는 미희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미희가 있는 제천에 찾아가서 미희를 만나고 싶었지만 제천에 가겠다는 나를 미희가 극구 말려서 가진 못했다.
나는 미희뿐이 아니고 국문과 82학번 여러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남학생들은 같이 술잔을 나눈 사람들이 많아서 편지를 보낼 사람도 많았지만 내가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여학생은 대여섯에 불과했다. 나는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못 쓰는 글씨였지만 정성껏 편지를 써 보냈다. 답장은 내가 군대에서 받는 것보다도 적게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적게 온 답장 중에 생각지 않았던 미혜 씨에게서 두 번의 답장이 와서 무척 흐뭇했다. 미혜 씨는 국문과에서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나는 미혜 씨를 보면서 선입견으로 ‘조선시대의 여자’같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좋아했었다. 내가 미혜 씨를 좋아했지만 나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시골출신이고 미혜 씨는 서울 사람이라 중국속담에 나오는 ‘두꺼비가 백조와 놀려고 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늘 조심스러웠다.
편지를 쓰는 것도 조심스러웠지만 내가 알고 지낸 사람이 몇 안 되어서 미혜 씨에게도 보냈던 거였다. 미혜 씨는 고구마를 삶다가 솥을 태운 얘기, 무를 썰다가 손가락을 썰 번한 얘기 등 그냥 일상적인 답장을 보내줬지만 나는 너무나 흐뭇했다. 나는 다시 편지를 보냈고 또 답장이 왔었다.
내가 생일 때에 혼자서 지냈다고 했더니, 서울에서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사겠다고 했다. 나는 미혜 씨가 사는 커피라면 어떤 커피보다도 맛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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