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양반은 누구인가?

2012. 9. 23. 13:57세렌디피티(serendipity)/올드스쿨입니다

 

 

 나는 스스로 내가 '양반'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요즘 세상에 무슨 '양반 쌍놈'이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사실 내가 '양반'이라고 말을 하는 데는 스스로 '양반'처럼 살기를 바라서다. 조선시대의 양반의 실체를 한두 마디로 얘기하기는 쉽지 않지만,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어보면 대충 짐작은 간다. 양반은 품위와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나는 새우나 게를 좋아하지만 그것들 껍질을 베껴야하는 것이 싫어서 손을 잘 안 댄다. 손에 냄새가 배고 길게 뻗은 것을 입에 넣고 씹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다. 내가 입성이 까탈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먹는 것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격식을 차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면서도 아무 데나 주저 앉는 것은 꺼린다.

 

 애들 앞에서 양반 얘기를 하면, 애들은 양반이 무슨 개념인지를 잘 모른다.

나는 그래도 늘 스스로 양반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양반의 품위를 지키고자 조심한다.

 

 

 양반

 

고려와 조선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좁은 의미로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며, 넓은 의미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배신분층을 지칭한다. 양반관료체제가 처음 실시된 고려 초기에는 관제상의 문무반이란 뜻으로 양반개념이 등장했다. 고려말 · 조선초부터 점차 현·전임관과 문무관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 및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여 지배신분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관제상의 문 · 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은 고려시대 경종대의 전시과(田柴科)에서부터 사용되었다. 경종 전시과에서의 문 · 무반 구분은 전시 지급을 위한 편의적인 구분으로, 관제상 문 · 무산계의 구분에 근거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고려 초기의 관계에서는 문 · 무산계의 구분이 없었다가 995(성종 14)에 당나라의 문 · 무산계를 채용했기 때문이다(색인 : 문산계). 관제상의 문 · 무 양반체제는 995년 문 · 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갖추어졌으며, 제도적인 측면에서 문반과 무반을 분명히 구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문·무산계가 불균형하게 활용되어 심지어 무반은 무산계를 받지 않았으며, 문반의 지위는 무반보다 지나치게 높았다.

 

이와 같이 불균형한 고려의 문 · 무 양반체제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균형을 찾게 되었다. 즉 고려 말기인 1390(공양왕 2)에 무과(武科)가 설치되고, 조선 초기인 1392(태조 1)에 문 · 무산계가 제정되어 실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문 · 무 양반체제가 갖추어졌다. 이런 문 · 무산계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이로써 양반체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는 문 · 무산계는 확정되었고, 관제상의 문 · 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개념도 확고한 제도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본래 양반이라고 하면 문 · 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했으나 양반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어감에 따라 문 · 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가부장적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관계 때문에 양반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문음(門蔭), 과거를 통한 관직의 세전(世傳), 그들 사이의 폐쇄적 혼인관계로 더욱 심해져갔다. 그래서 관제상의 문 · 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개념은 지배신분층을 뜻하는 양반개념으로 바뀌었다.

 

양반은 사대부(士大夫) · 사족(士族) · 사류(士類) · 사림(士林)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본래 사대부란 문관 4품 이상을 대부(大夫), 문관 5품 이하를 사()라고 한 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대부를 문관관료뿐 아니라 문 · 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사용했다. 또 사대부를 사족이라고도 했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이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와 사림이 있었다. 사류는 사족과 같은 뜻으로 쓰였고, 사림은 '사대부지림'(士大夫之林)의 준말로서 사대부군(士大夫群)을 뜻한다. 따라서 사대부사림사류 순으로 더 넓은 범위의 양반층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권지배신분으로서의 양반의 개념과 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조선 초기의 신분구조를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으로 나누고 양반을 상급지배신분으로 보는 설과,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을 양인과 천인으로 양분하고 16세기에 들어와 양반신분이 성립됨에 따라 초기의 양천신분이 점차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으로 분화되었다고 보는 설이다(색인 : 양천제). 전자의 설은 당시의 사회가 크게 양인신분과 천인신분으로 양분되는데, 양인신분이 혈연 · 직업 · 거주지 · 토지소유관계 등에 의하여 몇 개의 동권집단(同權集團)으로 분화되어 결국 양반 · 중인 · 양인의 구분이 생겼다는 것, 특히 양반들이 누리고 있던 각종의 특권을 밝힘으로써 조선 초기에 사회적으로 많은 특권을 향유하는 특권층으로서의 양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반은 본래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의미했으나 양반관료제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문 · 무 양반관료뿐 아니라 양반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까지도 양반(士族)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설은 조선 초기의 양반이 문 · 무 관료집단을 총칭하는 '유직자(有職者)의 대명사'로만 쓰였으며 특권적 지배신분으로서의 양반은 16세기의 과도기를 거쳐서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에 뚜렷하게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오직 '양인''천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양인(평민)이 양반을 충원하는 모()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종래의 통념인 조선 초기 특권신분으로서의 양반 존재를 부인하고 '양천' 이분법적인 신분체계를 제창한 것이다. 2가지 설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양반이 특권지배신분으로서 언제 성립되는가의 시기차이 문제이다.

 

지배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제반 신분적 특권이 구체화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나지만, 하나의 지배계층으로서의 생성은 13~14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말의 신흥사대부 계층에서 발전한 양반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성종상(姓種上)으로는 군현의 토성(土姓)에서 배출되었다. 토성은 고려 초기 이래 중앙이나 지방의 지배세력을 산출시키는 공급원의 역할을 했다. 15세기를 기준으로 볼 때 거족 · 사림파 · 상급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뿌리는 각기 군현의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같은 토성이라도 상경종사(上京從仕)하면 귀족과 관료가 되었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군현지배자로서 향리계층를 형성하여 지방행정실무는 물론,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족과 이족(吏族)의 분화는 여말선초에 더욱 촉진되어 재지사족(在地士族)에서 다시 재지사족과 이족으로 구분되고, 그것이 다시 양반과 중인으로 분화되었다. 이는 15세기 양반관료체제의 확립과정에서 기성 사족인 양반은 벼슬인 ''(), 이족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실무인 '이사'(吏事)를 담당하여 소관 직무까지 확연히 구분되면서 이족은 읍내(邑內), 사족은 성외 촌락에 거주하는 등 거주 지역까지 구분되었다. 이처럼 토성과 재지사족의 성장에서 볼 때 조선시대 지배세력인 양반은 고려 후기에서 말기 사이 군현 향리층에서 성장한 신분이며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층이었다.

 

양반관료체제의 제도적인 형식 요건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성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고려 말기에 이르면 양반층이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왕조의 성립 무렵에는 신흥양반이라고 할 사대부들이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인 확대정책을 취하는 한편 서얼차대, 현직 향리의 격하, 서리 · 기술관 등을 중인층으로 만들면서 최상위 신분층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렇게 형성된 양반들은 교육·응시(應試입사(入仕) 등에서 배타적으로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군역제도에서도 많은 특권을 누렸다. 또한 양반들은 같은 신분간에만 결혼이 이루어졌으며, 양반 내에서도 지체의 차이를 두었고, 무반가를 문반가보다 낮게 보았다. 이와 같은 양반들의 배타성은 그들의 정치적 ·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한 장치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지주와 노비소유주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국가의 관료가 될 수 있었고 권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다. 노비와 토지는 양반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노비는 양반의 수족(手足)과 같은 존재로, 그 소유의 과다는 양반의 가운(家運성쇠(盛衰)와 직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반사회의 예속(禮俗)과 체통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양반들은 노비제도가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예속과 풍교(風敎)를 진작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다. 양반의 노비증식방법은 토지와 같이 자신의 관직과 권력을 매개로 획득하기도 했고, 부변(父邊모변(母邊처변(妻邊)에서 상속·분재(分財)의 형식으로 받기도 했으며 또 기존 재산을 밑천으로 하여 새로 구매하기도 했다.

 

양반사회에 있어서 혼인은 학문·관직과 함께 양반의 신분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재산상속제도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 유지에 직접 관련이 있었다. 한번 양반이 되면 반역이나 다른 대죄(大罪)를 범하지 않는 한 '세전지가'(世傳之家)로 간주하여 관직과 토지가 주어짐과 동시에 양반의 수족인 노비를 내외(內外) 자손에게 대대로 전할 수 있는 노비세전법(奴婢世傳法)이 보장되었다. 양반의 이러한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기반은 가산(家産)의 자녀균분제(子女均分制)에 의하여 혼인과 함께 재산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양반들의 특권과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배타적인 장치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오면 사회적·경제적 변동과 군공(軍功납속(納粟)에 의한 제도적 신분상승 등으로 양반층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양반직역인 유학(幼學)은 사족으로서 벼슬하지 못한 유생(儒生)을 지칭하던 가장 확실한 양반직역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그 수가 사회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장적상(帳籍上)에서 급격히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양반의 유학 재생산, 충의위(忠義衛)의 유학으로의 직역이동, 서얼 후손의 합법화한 유학호칭, 비합법적인 모록(冒錄)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는 유학을 통해 신분이 상향 조정되면서 신분해체를 지향했으며, 중세 불평등사회에서 근대 평등사회로 향하는 과도기인 중세 해체기의 사회구조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李俊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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