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21. 14:52ㆍ시우의 여행기
오던 날, 17년, 8월 15일.
최 교수 님이 나를 깨워서 눈을 떠보니 시간이 04시 30분이었다. 거의 다 왔다고 짐을 챙기라고 해서 정신없이 내려와 짐을 점검하고 내릴 준비를 했는데 차가 예정보다 45분이나 연착을 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중국사람들은 아예 내릴 준비를 해서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데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들 서 있었다.
나는 6인실 상층이라 꼭대기였는데 중층인 김 실장님과 자리를 바꿔서 내가 중층에서 자고 김 실장이 상층에서 잤다. 여덟 시에 자리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는데 별 무리 없이 잠이 왔고 중간에 한 시쯤에 깨어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또 잘 잤다. 그런데 내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곯았다고 아댠들이었다. 특히 김 실장은 내가 코를 고는 소리에 잠을 전혀 잘 수가 없었다고 화를 내면서 나더러 서울에 가면 수술을 받어야 한다고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코를 골았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더니 하층에 자리했던 연세 많으신 사모님이 웃으면서 징말 심했다고 했다. 우리 셋이 아래 위였고 다른 쪽은 중국인 세 사람이 아래 위로 자리를 했는데 그 사람들도 내 코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잤을 것 같아서 미안했다.
차가 연착이 되면서 일곱 시 반에 보딩한다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급하게 서둘러야 한다면서 유니스가 앞장을 섰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서 사름들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중국역은 다들 엄청 크게 지어 놓았는데 새벽 다섯 시 반인 그 아침에도 우리나라 명절 때 서울역이나 용산역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쿤밍에 도착했던 날, 탔던 빵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태우고는 정말 날아가다시피 달렸다. 모든 차들이 공항가는 고속도로에서는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해서 공항에 도착했는데 우리 팀은 다른 팀들과 합류해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유니스가 미리 와서 수속을 밟고 있었다. 거기서 짐을 부치고는 바로 나갔다.
간신히 시간을 대서 비행기에 탔는데 나와 김 실장님, 유니스가 같은 줄에 앉았다.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하면 우리 셋은 서울로 가고, 다른 열두 분은 부산으로 가는데 미리 그렇게 좌석을 준 것 같았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유니스와 김 실장님은 잠이 들었고 나는 밤에 충분히 잤기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사람을 다 태운 비행기가 07시 50분에 출발해야할 것이나 움직일 기미가 없더니 무려 한 시간 반 가까지 서 있다가 이륙했다. 이번에는 상해 푸동공항에 가서 문제가 될 거라고 걱정을 했다. 시원찮은 기내식을 줘서 그걸로 아침 요기를 했다. 공항에서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돈이 401위안으로 100위안짜리 넉 장과 달랑 1위안만 있어서 그것을 깨기가 좀 뭐해서 그냥 참은 거였다.
상해 푸동공항에서 14시 15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대한항공과 동방항공 상해항공의 세 업체가 상해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거였다. 우리는 푸동공항에 내리지마자 부산으로 가는 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출국장으로 갔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김재양 씨를 찾아가 악수하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늘 같이 움직인 기종 씨와 미경 선생은 보이지 않아서 인사를 못해 아쉬웠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정신없이 움직여서 다서 검사를 받고 출귝장으로 나가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도 점심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비행기에 탔는데 국제선이라 그런지 정시에 출발을 했다. 나는 출발하면서 바로 시계를 한 시간 당겨 놓았고 휴대폰을 챙겨 두었다. 기내식도 이번엔 그런대로 괜찮았고 물도 한 병씩 줘서 받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유니스가 물 한 병을 사 줘서 그걸 마시다가 조금 남았는데 새로 물을 주기에 받은 물은 사진기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인천공항에 17시 25분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그보다 한 10분 먼저 닿은 것 같다. 다만 먼 곳에 내려 놓아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집사람에게 전화했고 최교순 선생님과 구원이 형님에게 전화했는데 형님은 홍제동에 오시겠다고 해서 그러기로 하고 경숙이에게 전화해서 홍제동으로 오라고 했다.
짐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전철을 타기 위해 헤매다보니 금방 여섯 시 20분이 되었다. 홍제동에서 일곱 시에 만나기로 한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도 조금 늦는다고 전화를 했다. 디지털단지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는데 집에 짐을 가져다 놓고 갈 생각을 바꿔서 바로 홍제역으로 가면서 집사람에게 양해 전화를 했다. 그리는 와중에 형님이 전화를 두 번이나 했고 경숙이가 전화를 해서 통화했는데 통화하고 3분 정도 지난 뒤에 홍제역에 도착했다.
거기 대박갈비집에서 소주 네 병을 마시면서 여행에 관한 이야기 나누고 내일 다시 종로에서 보자고 얘기한 뒤에 헤어져 집으로 왔다. 너무 피곤해서 자세한 얘기는 내일로 미루고 샤워한 뒤에 바로 잤다.
드디어 13일의 여행을 끝내고 집에 온 거였다.
가던 날, 17년, 8월 3일.
네 시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사진기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K-30이 가볍긴 하지만 크롭 바디여서 풀사이즈인 K-1을 가져가는 것이 나을 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가방을 로우프로 스텔스 400으로 바꾸고 K-1 사진기와 18-55, 70-300, 17어안 세 개로 꾸렸다. 무게가 가방 포함해서 6kg 정도였는데 이게 두고두고 어깨를 힘들게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28-105를 가져가지 않은 점도 후회가 많았고 24-50 생각이 간절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침밥을 먹고서 배낭과 가방을 가지고 집사람이 홍대역까지 태워다 줘서 거기서 전철을 탔다. 집앞에서 리무진을 타는 것도 생각했지만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네어세 티를 내고 돌아다니는 것은 좀 우습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홉시 반에 모인다고 했는데 내가 10분 전에 도착을 하여 전화를 했더니 지금 공항 근처에 왔다는 대답이었다. 가이드가 같이 가는 것이 아니고 공항에서 수속만 밟고 다른 사람이 인솔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홉 시 반에 되어 다들 모이니, 한 가족 네 명과 부부가 여섯 쌍, 그리고 나와 같은 깍두기가 한 사람 있어 자연스럽게 나와 그 사람이 룸메이트가 되는 거였다.
투어인케이씨에서 나온 '클레어'님이 항공 수속을 다 해주고 간 뒤에 우리는 공항 출국장으로 나갔다. 다들 끼리끼리 가고 나와 룸메이트가 될 분과 둘이 남아, 자기 소개를 하다보니 서울 모 고등학교 행정실장으로 59년 생이었다. 같은 교사는 아니라도 학교에서 근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다들 마산과 울산 쪽 사람들인데 서울 사람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초면이지만 쉽게 가까워졌다.
김 실장님이 아침을 안 먹고 나왔다고 빵으로 요기를 한다기에 나는 밥을 먹고 나왔다고 했더니 커피를 한 잔 사줘서 마셨다. 그렇게 이런 저런 시간이 지난 뒤에 12시 15분에 출발하는 난징행 동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늘 국적기만 타고 다니다가 중국 민항을 타니 승무원도 생소하고 방송하는 내용도 영어와 중국어만 나와서 알 수가 없었다.
기내식은 밥과 국수 중 택일이라고 하는데 나는 밥을 먹었다. 우리나라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보다는 훨씬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가서 난징에 13시 25분에 내렸다. 시차가 한 시간이 나서 시간으로는 한 시간 밖에 안 걸린 것 같지만 두어 시간 비행기를 탄 거였다. 공항에 내리면서 시계를 한 시간 뒤로 조정해 놓았다. 나와 김 실장님은 맨 앞에 나가서 짐을 찾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실장님은 괜찮다고 다 나올 거라고 했다. 그래도 기다릴 것 같아서 자꾸 뒤를 보다보니 한참 뒤에 다른 일행들이 나오면서 먼저 나온 우리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뒤에 남아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런 곳에 가서 개별행동을 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실수를 한 거였다.
그렇게 조금 불편한 가운데 다들 만나서 서로 확인하고는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7시 05분 쿤밍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인천공항보다 훨씬 심하게 검색을 했는데 다 미리 주의사항을 몇 번 듣고 왔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출국장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16시 20붅 쯤에 우리가 나갈 32번 게이트로 갔더니 게이트가 47번인가로 변경되었다는 방송이 나와서 서둘러 갔는데 문제는 비행기가 출발하는 시간이 나오질 않고 천기 상황이 안 좋아 출발이 지연된다는 문자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19시에 출발한다는 얘기가 있다고 해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19시가 넘으니까 아예 언제 출발할지 얘기가 아주 없었다. 나는 김 실장님과 같이 저녁을 먹자고 32번 게이트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35위안 하는 국수를 먹었다. 그러고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18명 중에 중국말이 조금 통하는 사람은 가족 팀의 큰 따님 하나 뿐이었다. 희원 씨는 여행사 관계자가 아니고 그 여행사의 여행을 여러 차례 해서 직원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래서 가이드가 없는 우리 팀의 중간 인솔자가 된 셈이었다. 대부분 중국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항상 희원 씨 입만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출발이 지연이 되어도 시간이라도 정해졌다면 그나마 낫겠는데 아무 기약도 없이 그냥 난징공항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아홉 시가 지나고 열 시가 지나도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아무리 중국이라고 하지만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다들 지치고 힘이 빠졌는데 21시 40분에, 갑자기 방송이 나와서 쿤밍행 비행기를 탈 사람들은 호텔로 가서 잠을 잘 수 있게 할 것이니 관계자를 따라 가라고 해서 우루루 나갔다. 나는 방송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원 통로를 통해서 우루루 나가면서 별 일이 다 있다고 좋아했는데 인원 점검을 해보니 울산에서 온 부부 한 팀이 안 보였다. 다들 버스에 탔다고 하는데 우리 팀은 그대로 남아서 아직 사람이 안 왔으니 탈 수가 없다고 버텼고 안 온 사람과 통화를 해서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다 되어도 그 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는 곳이고, 우리가 빠져 나온 곳은 직원통로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으니 두 사람을 직원 통로로 보내 줄리가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걱정을 하고 특히 중국어가 되는 희원 씨가 애를 먹었다.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 중이라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렇게 더위 속에서 20분이 지난 뒤에 드디어 만났다.
긴 얘기를 할 수가 없었고 우리는 22시 쯤 버스에 탄 뒤에 기분이 좋아서 중국에 오니 별 일이 다 있다교 약간의 흥분에 들떠 있었다. 차가 한참을 가길래 어느 호텔로 가기에 이렇게 먼 가 했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에 차가 들어서는 곳은 호텔이 아니라 공항이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우리가 버스를 타고 떠난 사이에 비행기가 출발할 수 있다고 해서 다시 공항으로 데려 왔다는 거였다. 어이가 없었다. 역시 중국은 중국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다시 공항 줄국장으로 가서 검색을 받고 들어갔다.
가서 보니 열두 시가 넘은 시간에 비행기가 출발한다고 전광판에 문자가 뜨고 있었다. 그래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는데 일부 중국인들이 거칠게 항의를 했다. 배상을 하라는 얘기라고 하는데 우리보다 두 시간 먼저 떠난 칭타오 공항 가는 사람들은 200위안의 배상금을 받았다는 거였다. 하지만 말발이 안 서는 건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우리에겐 배상금이 없었다. 열두 시가 넘은 0시 5분에 비행기를 타고 쿤밍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쿤밍에 도착한 시간은 03시 였다.
중국은 역시 중국이었다.
우리는 운남에 오며, 가며 중국의 항공시스템을 제대로 경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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