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국부,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그리고,,,

2015. 2. 7. 09:20시우의 여행기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Atatürk)

 

이 글은 인터넷 엔위하키 미러에서 옮겨 와 수정한 글입니다.

 

터키의 국부. 1881519일 테살로니키 출생, 19381110일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사망. 오스만 제국의 장군이자 갈리폴리 전투와 터키 독립전쟁의 영웅.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23년부터 1938년 사망할 때까지 15년간 재직했다. 암울한 상황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정치인으로써 사회 체계와 문화를 정비하여 근대 국가인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인물.

 

특히 정치인으로써 식견이 뛰어났는데, 구태적이었던 이슬람 문화권 출신의 인물임에도 정교분리를 추구했으며, 당시 앞서나가던 유럽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문자를 정비하여 문맹률을 크게 낮추고 여성 인권을 높였다. 외교에 있어서도 국제정세를 잘 이해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다만 쿠르드인 학살 및 탄압, 아르메니아 학살에도 관여했다는 의혹 및 증거도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던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라는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이라는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은 본래 별명으로 '완전무결'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수학 선생님이 그의 뛰어난 수학실력에 감탄하여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모든 사람에게 성을 쓰게 하면서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터키에서 고위 관료에게 쓰는 경칭인 '파샤'를 붙여서 '케말 파샤(Kemal paşa)'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한국 세계사 교과서에선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나오곤 했었다. 가지(Gazi)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터키 독립전쟁당시 대국민의회가 준 칭호로 '신앙의 수호자'를 의미한다. 때문에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기 전에는 그를 '가지 무스타파 케말 파샤(Gazi Mustafa Kemal Paşa)'라고 불렀었다.

 

'아타튀르크(Atatürk)''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원래는 터키 국민 의회에서 받은 성씨이지만 끝내 이 성씨를 물려받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을 뜻하는 고유어로 정착된 것. 자칭이 아니다. 현재는 이 성씨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이 되어있다고 한다.

 

7살 때 아버지인 알리 르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라그프 베이(Ragıp bey)라는 무역상과 재혼했다. 라그프는 무스타파와 누이동생인 마크불레에게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처럼 따르길 바랐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다. 결국 부모에게 아무 말 없이 1893년 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에 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가서(여기서 수학선생이 케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공부했고 사관학교를 거쳤다.

 

소위로 임관된 것이 1905년 일이었다. 꽤 늦게 소위로 임관했던 이유는 1902년에 소위로 임관될 것을 마다하고 다시 왕립사관 군사학교에서 전문사관학교를 재학하면서 더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은 늦었지만 재학생 및 성적 우수 특혜로 곧 중위로 진급했다.

 

시리아 주둔 부대로 들어갔던 아타튀르크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서 보수적인 상관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술탄 압뒬하미드 2세의 보수정책에 반대하는 젊은 군인들이 대거 가입했는데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도 여기 가입하여 알게 된다. 1908년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인 리비아 주둔 부대로 전속되었고 1910년에 리비아로 쳐들어온 이탈리아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소령으로 진급된 그는 1911년 리비아 투브루크 전투에서 2백 명의 오스만 군을 거느리고 2천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면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를 넘겨주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끝내자 그는 분노했다. 곧이어 터진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1913년 불가리아군을 물리쳤고 이 공로로 중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1914년 불가리아 주둔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서 지내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고 그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 대령으로 진급된 그는 영국군이 상륙해서 오스만 제국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를 갈리폴리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고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장군이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준장이 된 그는 에디르네 방어전에서 연합군을 막아내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캅카스 전역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치면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겨우 3년에 쾌속진급으로 36살 나이로 오스만 제국군 7군단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다른 전선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계속 밀려났고 결국 1차 대전은 패배로 끝나게 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독일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했다.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맺어서 수도 이스탄불과 그 주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터키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195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그는 되려 휘하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령(İsmet İnönü, 1884~1973)을 만나게 되면서 그도 합류하게 된다.

 

한편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케말의 배반에 경악했다.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앞 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빴다. 78일 그는 이제 나는 오스만 제국군인이 아닌 터키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하며 스스로 제국 군인이 아님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바스(Sİvas)에서 항전결의를 한다.

 

1920423(이 날은 터키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여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터키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 및 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터키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 1877~1920)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병력 수도 그렇고 무기와 총알도 부족했다)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참고로 그는 군인이 아닌(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다) 민간인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이 동네 사투리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텝 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울루(Yusuf Beyazoğlu, 1880~1956)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울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6천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 1882~1948)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823일부터 9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 전투(Sakarya savaşı)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6]를 내고 사기도 떨어진 그리스는 차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연합군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제국과 맺은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1922830일 퀴타히아(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1869~1956)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6천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압도적으로 패한다. 이 날은 터키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이다.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오스만 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오스만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군의 학살로 많은 오스만이 학살당하자 케말과 이뇌뉘는 이걸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11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케말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연합군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희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그리스도 아나톨리아 반도의 모든 땅을 포기한다고 물러나면서 1923724일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

 

터키 공화국 건국 직전, 케말은 동갑내기 장교학교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엔베르는 튀르크인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야심에 젖어있었고, 케말은 이걸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금은 너무 위험하고 이르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나톨리아에서 다시 힘을 찾으면서 여기서 시작하자고 되려 엔베르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엔베르가 거부하고 떠난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케말에 의하여 멸망하자, 엔베르는 유라시아로 건너가 튀르크계 나라를 통합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지만, 오래가지 않아 그곳에 살던 튀르크인들과 갈등 속에 빚어진 내전에 휘말려 죽게 된다. 엔베르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관여했던 지라 아르메니아인이 저지른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쟁 와중에서 자세한 건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케말도 민족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케말과 엔베르는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케말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터키를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 만드는 것에서 한 발짝도 어긋난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을 포함하는 식의 다양한 문화의 집단을 아우르는 제국은 내재적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상충하는 것이었으므로 터키인들의 국가라는 케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히 이슬람주의자들의 원수 또한 케말의 외교정책은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2차 세계대전의 참전도 거부하는 등 터키가 전쟁이나 외부의 간섭으로 국가 형성에 방해받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을 지향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쟁을 야기하고 러시아 등의 반발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231029일 튀르키예, 즉 터키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된다.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 년 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디웨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쓴다.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11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터키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공화파와 이슬람세력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저서 '',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 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 무렵, 아타튀르크는 히잡을 금지시키고 싶었는데, 이슬람 국가에서 히잡을 금지하면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제정된 법안이 모든 창녀는 히잡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모든 여자는'이 아니라!). 더불어 여군 사관학교를 인정하였고 미군이 선정한 20세기 세계의 명 조종사 100인에서 유일한 여군으로 들어간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 대령이 바로 아타튀르크가 여군사관학교 공군부 수석으로 높게 인정하고 양녀로 받아들였던 인물이다.

 

라틴 문자를 도입한 것은 터키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 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니다.

 

알타이어 계통에서 시작한 터키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어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고,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들어가졌고.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아랍어가 정식언어가 되어서 터키어는 어랍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였고 문자 역시 아랍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문자는 자음에 비해 모음이 적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터키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 만들고 땡이 아니라, 입말에서도 아랍어와 페르시아식 표현 대신에 터키어의 고어와 방언을 살리고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터키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한 식견도 대단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도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고,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히틀러에 대해서도 제 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 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머지않아 제1차 세계대전 급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 미국이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손에 종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직계 자손도 남기지 않았다. 공화국 수립 이후 라티페 우샤키(Latife Uşşaki, 1898~1975)라는 여성과 1923년 결혼했지만 자신이 자손을 남기게 될 경우, 이미 터키 국내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통령을 해 먹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끝에 2년 만에 이혼하였다.

 

사실은 부부간의 문제도 있었다. 케말 파샤는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했던지라 그에게 목숨을 건 여자가 몇 있었다. 케말 파샤의 오랜 애인이었던 한 여자는 의붓아버지의 친척이었는데 케말 파샤에게 버림받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그의 집에서 자해해서 피흘리는 것을 경호원들이 발견해서 옮겼을 정도다.

 

한편, 이혼했어도 우샤키는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다면서 27살 젊은 나이임에도 다시는 재혼하지 않고 5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찾아온 기자가 "소문으로 당신이 숨어 산 게 아타튀르크에 대한 가정사를 털어놓을까봐 협박당해서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면서 "냉큼 나가라! 그는 그런 적도 없었고 내 스스로가 괜히 나 때문에 그분이 곤란해할까봐 알아서 조용한 곳에서 산 것뿐이다!"라고 분노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케말이 이혼을 한 건, 자신이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암살당한 남자의 부인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살아서도 죄인으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이혼했다는 거다.

 

격무에 시달리던 아타튀르크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장기간 지방 시찰을 떠났고, 이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결국 19381110일 오전 9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매년 11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든지 여러 문화유적지에서도 시계는 항상 이 시간에 멈춰져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자신의 재산의 극히 일부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터키만의 이야기. 자국에서 우대받는 윈스턴 처칠이나 샤를 드골이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서 저지른 짓을 보면 학살자, 억압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듯이 아르메니아인이나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눈으로 봤을 때 그는 학살자인 셈이다.

 

대표적인 아타튀르크의 전쟁범죄로 지목되는 사건은 1937년 데르심 반란의 수습과정이다. 데르심 반란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1차는 1937320일부터 11월 말까지. 2차는 193812일부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의 원인은 터키 공화국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데르심(Dersim, 현 지명은 툰젤리 Tunceli) 도의 토착 부족장들이 부족민들을 모아 저항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지방행정은 도시에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지만, 향촌은 대체로 현지 부족장 혹은 공동체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데르심 지역의 경우 알레비파 자자족과 순니파 쿠르드족,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 때 생존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터키정부는 공개처형과 공중폭격까지 동원해가며 이를 진압했다.

 

당시 터키 공화국은 지방자치세력이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실제로 1925년 남동부 터키에서 오스만 복고운동이 터져 곤란에 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을 힘으로 깡그리 누르려 했다. 이때 희생된 숫자는 반란군 6000여명을 포함해 민간인 13806(터키국회 공식추산)에서 40000여명(데이비드 맥도웰 추산)에 달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에 속한 민간인 11,818명은 이후 터키 전국에 분산이주 조치되었고, 도 이름도 툰젤리(Tunceli)로 바꾸었다.

 

그밖에도 아라라트 공화국을 무너뜨린 뒤에 강화시킨 쿠르드족 문화탄압 및 그들의 언어 및 생활양식 파괴도 빼놓을 수 없는 비판점이다.

 

아르메니아에선 근대 이후 5번째로 규모가 큰 학살인 아르메니아 학살에도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이 운동은 아르메니아인 300만 중 100~ 200만을 학살(아르메니아 주장)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축이라는 것.[13] 가령 1921, 터키 독립군은 마라쉬(Maraş)에 주둔해있던 프랑스군 5000명을 3만으로 공격한 다음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이었던 마라쉬 시민 1만 명을 학살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돈과 프랑스에 협조한 병사 200명을 넘겨줬는데도 반란 위험이 있단 이유만으로 학살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마라쉬가 프랑스군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독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승인하기도 했고 장티푸스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가는 걸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치세 중에 활성 중지되지 않은 티푸스 백신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뿌렸다고 고백한 의사도 있다. 그 밖에도 발칸과 아나톨리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 명사들을 암살 사주한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호로 아르메니아 학살에 관한 것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과 마라쉬 학살 역시 그 당시 상황으론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측에 붙어 튀르크인(당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에 붙을 경우 당장 국가존재 자체가 위협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게다가 터키 측에서 반론으로 나오는 의견에는 1910년대에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세력에 있어서도 끗발조차도 날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청년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가 집권하고 있었고,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한건 1920423일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 등을 만나고 술탄정부에 반란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아타튀르크가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감독관 자격으로 1919119일에 카이세리를 방문하고 한 연설을 참고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타튀르크의 성향은 민족주의보다는 이슬람 종교를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부순 건 1920년 초 이스탄불을 방문한 이후부터라는 반론도 있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책임을 아타튀르크에게 더 크게 강조하려고 죄다 덮어씌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시리아-이라크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건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아르메니아 학살 항목에 그의 일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 그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 사항이다. 쿠르드족 학살과 탄압도, 아타튀르크 시대가 아닌 1980년 케난 에브렌 시절에 본격화된 문제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선 아르메니아 측 주장이 과장된 면이 있고 투르크족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반대되는 사료나 아르메니아 측에서 한 학살에 대한 증거를 들어가며 반론하고 있고 그 당시 상황으론 불가피했다.

 

쿠르드족 민족주의자 입장에서도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인 게, 아타튀르크가 바로 터키인의 통합이란 명목하에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도 (몰래) 아타튀르크를 욕하고 다녔다. 이런 진영에서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무신론적 세속주의를 받아들이고, 터키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 만큼 열성적이다. 길거리 노점상도 아타튀르크 초상화를 자기 노점에 걸어두는가 하면 대부분의 터키 회사들은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다. 물론 터키의 모든 관공서 건물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아타튀르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어록중 하나인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주권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인민의 것이다)라는 어록은 그의 무덤에서부터 시작해 터키 어디에서다 볼 수 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Atatürk Caddesi)라는 이름이 붙고, 도시의 중심가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동상을 뜻하는 터키어인 헤이켈(Heykel)은 몇몇 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터키에서는 터키의 관문공항이자, 이스탄불 제 1공항의 이름을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Istanbul 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 명명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곳이다. 이런 아타튀르크 사랑은 해외에도 유별나서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집에선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터키 국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고향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남은 그가 태어난 집은 1933년 그리스 테살로니키시에서 터키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해 그 집에다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세운 것을 계기로 1937년에 테살로니키시가 집을 구입해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지금은 박물관에 지나지 않지터키인들이 그리스 오면 여길 반드시 들른다고 한다. 그리고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농장(Atatürk Çiftlik Ormanı)에 가면 테살로니키의 생가를 완벽하게 복제한 집이 있다. 아타튀르크가 말년에 농사를 지으면서 쉬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어록이다.

 

 

Memleketin efendisi hakiki müstahsil olan köylüdür.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Doğruyu söylemekten korkmayınız.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Beni görmek demek mutlaka yüzümü görmek demek değildir Benim fikirlerimi, benim duygularımı anlıyorsanız ve hissediyorsanız bu yeterlidir.

나를 본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그리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Türkiye Cumhuriyeti mutlu, zengin ve muzaffer olacaktır.

터키 공화국은 행복, 풍요, 그리고 승리를 얻을 것이다.

 

Sağlam kafa sağlam vücutta bulunur.

건강한 생각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

 

Türkiye Cumhuriyetinin temeli kültürdür.

터키 공화국의 기초는 문화다.

 

Büyük hedefimiz, milletimizi en yüksek medeniyet seviyesine ve refaha ulaştırmaktır.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우리들의 조국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과 번영을 이룩하는 데에 있다.

 

Öğretmenler: Yeni nesiller sizlerin eseri olacaktır.

선생님들이여, 새로운 세대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터키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Yurtta barış, cihanda barış.

가정에서 평화, 세계에서 평화. (현 터키공화국의 모토)

 

Geldikleri gibi giderler.

그들이 왔던 것처럼, 그들은 떠날 것이다.

 

Benim naciz vücudum elbet bir gün toprak olacaktır, ancak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는 먼지가 될 것이나, 터키공화국은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것이다.

 

Bu millete çok şey öğretebildim ama onlara uşak olmayı bir türlü öğretemedim.

이 나라에서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머슴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Süngülerle, silahlarla ve kanla kazandığımız askeri zaferlerden sonra, kültür, bilim, fen ve ekonomi alanlarında da zaferler kazanmaya devam edeceğiz.

총검으로, 무기로, 그리고 피로써 승리한 우리 군대는 승전 이후에는,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경제의 전장에서도 또한 승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Zafer, "Zafer benimdir" diyebilenindir Başarı ise, "Başaracağım" diye başlayarak sonunda "Başardım" diyebilenindir.

승리는, "승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며, 성공의 경우,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에는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Egemenlik verilmez, alınır.

권력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획득하는 것이다.

 

Egemenlik, kayıtsız şartsız ulusundur.

권력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인민의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

 

Milleti kurtaranlar yalnız ve ancak öğretmenlerdir.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홀로, 그리고 오로지 선생님들이다.

 

Hayatta en hakiki mürşit ilimdir.

인생의 가장 진실 된 조언자는 과학이다.

 

Türk Milleti bağımsız yaşamış ve bağımsızlığı varolmalarının yegane koşulu olarak kabul etmiş cesur insanların torunlarıdır. Bu millet hiçbir zaman hür olmadan yaşamamıştır, yaşayamaz ve yaşamayacaktır.

터키 민족은 자유롭게 살아왔으며,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의 고유한 존재를 인식하며 지켜온 용감한 이들의 손자들이다. 이 민족은 결코 자유 없이 살아가지 않았으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Biz Türkler tarih boyunca hürriyet ve istiklale timsal olmuş bir milletiz.

우리 터키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자유와 독립을 실천해온 민족이다.

 

Milletimiz davranışlarında ve gayretlerinde sarsılmaz bir bütünlük gösterdiği için başarılı olmuştur.

우리 민족은 행동과 노력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연대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힘으로 한  나라의 모습을 바꾸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파샤. 그가 자국의 독립을 위해서 다른 민족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한 것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노력과 열정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터키가 현 시점의 이슬람국가에서 가장 발전이 된 게 다  그의 탁월한 식견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터키 여행을 하면서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던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제게 큰 수확이었습니다. 

 

  생전에 토지개혁을 못한 걸 가장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토지개혁에 손을 대지 못한 건 독립전쟁을 치룰 때에 지주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다 쓰기 위해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토지개혁은 독립 후 100년이 지났으니 그가 아니 다른 대통령의 몫일 겁니다.

 

 케말의 위대한 점에서 하나 더 제가 감명을 받은 것은 교사의 역할을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교사가 나라의 장래를 만들어가는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무리,

 

 

조금 길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비행기 타고 열두 시간을 갔다가 아홉 시간 반을 왔는데 이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버스 타고 열두 시간은 그래도 견딜만한데 비행기는 너무 좁고 보이는 것도 없어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여권을 조심하라는 것과 대부분 날치기와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얘기입니다. 처음에 그게 무척 신경이 쓰여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몇 번 나가면서 별 일이 없다보니 이젠 면역이 되었는지 그렇게 조심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1월 24 오후 네 시 반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시간으로 고쳐 놓으니 열한 시 반이었습니다. 타자마자 바로 저녁식사가 나와 먹고서 조금 있다가 잠이 들어 비몽사몽으로 정신없이 보냈는데 25일 아침 일곱 시라고 다시 밥을 줍니다. 2015년 1월 25일은 음력으로 12월 6일 제 생일입니다.

 

 아홉 시 반에 인천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은 뒤에 무슨 비행기 마일리지 신청을 한다기에 따라다니면서 그 신청서를 내고 받고 하면서 한 시간이 지났고 늘 하던대로 리무진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다들 헤어져서 가고 저는 연세 드신 분과 둘이 타고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볍게 집을 향했는데 얘기하다보니 등에 늘 지니고 다니던 사진기 배낭이 온데 간데 없어진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제 사진기 배낭 분실한 거 같습니다.' 하고 보니 정말 등에 지고 있어야 할 배낭이 없는 것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다시 공항으로 가야 했는데 왜 이리 차가 더디고 안 오는지,,,, 공항에 아는 분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게 생각이 나서 얼른 전화를 했는데 자기가 있는 자리를 뜰 수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계산을 해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0만원은 될 거 같은데 이걸 잃어버린다면 이제 사진도 접어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항 화장실에 놓았거나 짐을 찾는 곳에 놓은 게 확실한데 이걸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는 '우리나라인데 누가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분실물 센터에 가져다 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가서 툭하면 농담으로 "인샬라" 즉 '알라 신의 뜻에 따라' 될 거라고 웃고 떠들었는데 이거야말로 인샬라가 된 것입니다....

 

 제 짐을 연세 드신 분께 맡겨 놓고 불이 나게 뛰어 갔는데 거기 입국장에 들여보내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자원봉사하는 분과 통화하를 하면서 제가 분실했을 위치를 기억해서 얘기하고 공항을 나올 때에 버리려고 캐리어에서 떼어냈던 꼬리표를 주머니에서 찾아 내밀고 사정했더니 제 몸 검사를 한 뒤에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총알처럼 뛰어 들어갔는데 짐을 찾는 곳 의자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제 사진기 배낭이 보였습니다. 얼른 열어보니 사진기와 렌즈 그대로 다 들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행 분께 전화하고, 신경을 써 주신 자원봉사 하는 분께 전화하고 공항에서 일하는 분들께 허리 숙여 인사하고 정신없이 나왔습니다.

 

 인샬라,,, 계속 사진 찍으라는 신의 뜻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자기 거가 아니면 가져가지 않고, 손도 대지 않다니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제게 생일선물로 제 사진기를 챙겨주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함께 여행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긴 시간 함께 해준 KRT 터키 가이드 최해성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