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그리고 다르나넬스 해협

2015. 2. 2. 20:58시우의 여행기

 

 

트로이의 목마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한두 번은 들어봤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트로이가 터키 땅에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트로이의 목마를 다룬 '호머(호머르스, 제가 배울 때는 호머였는데 그건 영어식 이름이고 로마식으로 발음하면 호머르스입니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그리이스, 로마신화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일리어드가 트로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트로이의 전쟁과 그 전쟁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딧세우스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화라고 하지만 아주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이야기되며, 이 작품이 서양문학의 뿌리가 되었다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신화 말고도 헤로도투스라고 하는 위대한 사학자가 쓴 '역사'라는 책에 이 트로이 전쟁이 기록이 되어 있고 뒷날 발굴된 힛타이트족의 기록에도 이를 증빙할 만한 많은 자료들이 나오고 있어 그게 단순한 신화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신빙성을 갖게 되었고, 독일의 '실리이만' 이라는 실업가가 이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트로이의 이야기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트로이의 얘기는 좀 장황하지만 인터넷 위하키백과사전에서 옮겨 보겠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과 영웅들이 개입한, 도시국가 트로이와 그리스를 주축으로 한 아카이아 연합군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 발단은 올림포스의 세 여신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누가 황금사과를 가질 것인가로 다툰 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나중에 아킬레우스를 낳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자신을 초청하지 않은데 격분하여 던진 떡밥이었는데, 하필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혀있는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세 여신들 사이에 싸움이 붙어 결말을 내기 위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부탁하게 된다. 그런데 여신들이 파리스에게 몰래 찾아가 자신을 선택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헤라는 최고의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셋 중 제일 쓸 모 없는 위대한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트로이가 망조가 들려고 했었는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조건을 받아들여서 아프로디테를 승자로 선언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에게 데려다 주지만 이게 하필이면 유부녀인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였다. 아내를 뺏겨 격분한 메넬라오스왕은 자기 형인 미케네왕 아가멤논과 함께 수많은 영웅들,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트로이도 만만치는 않았는데, 강력한 성벽을 두르고 프리아모스 왕의 장남인 명장 헥토르, 헥토르의 사촌 아이네이아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려 10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싸우다 헥토르가 죽고 만다.

 

다른 설에는 트로이 부근에 쳐들어가긴 했지만 곧바로 트로이로 쳐들어가진 않고 주변의 국가들부터 약탈하고 박살내고 나니 9년째였더라 하는 말도 있다.

 

여하간 10년이 넘게 결판이 나지 않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성 앞에 남겨두고 군대를 물렸다. 트로이인들은 거대한 목마를 그리스의 화해선물로 착각하고 성안으로 들였다. 라오콘이 목마를 성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이걸로 포세이돈을 자극해 바다뱀에게 아들 둘과 함께 죽고 만다. 결국 묵살 당했고 카산드라 또한 목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앞의 예언자님이 죽은 것 때문인지 설득력이 없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트로이인들이 승리의 잔치를 벌여 취해있던 사이, 목마 안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오딧세우스와 병사들은 트로이인들이 방심한 틈에 목마에서 나와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헬레네를 구해냈다.>

 

 

 

  트로이의 유적이 나온 바닷가 마을입니다.

 

 

 

 

 

 

 

 유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마,,,,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으며 왔었다는 증거늘 만듭니다.

 

 

 

 

 

 

 

 

 

 

 

 

 

 

 

 

 

 

 

  이 십 년 간의 전쟁이 끝나면서 트로이가 함락이 된 거였습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오랜 전쟁이 되었다는 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그리스 작가들의 영원한 원천이 되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가장 대표적인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의외로 이 외에 트로이 전쟁에 관한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그 전후의 사건이 메인이 되는 일이 잦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큰 것이 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고대 이후 중세에는 트로이 전쟁사를 다룬 책도 여러 권 나왔다. 물론 거의 역사서 가깝게 지어졌지만. 또 중세에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영웅에 대한 이야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특징.

 

많은 이들이 트로이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로 여겼지만 호메로스에 감명을 받고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가 1870년에 발굴되었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한 제2층의 트로이를 트로이 전쟁시대의 트로이로 생각했으며 이곳에서 발견한 황금유물들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부르며 빼돌리기까지 했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결과 슐리만의 착각이라는 게 밝혀졌다.

 

트로이 전쟁이 과연 실제의 전쟁이었는지 역사학자들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외교문서를 통해서 트로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월루사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 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학자들 중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식민지인 월루사가 곧 일리오스=트로이로 비정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트로이는 입지적으로 험난한 다르다넬스 해협을 피해 소아시아로 육로수송이 가능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런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인들이 쳐들어와 트로이를 정복한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 유적들은 시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도 유물이 부러운 게 아니라 넓은 땅이 더 부러웠습니다.

 

 

 

 

 

 

 

 

 

 

 

 

 

 

 

 

 

 

 

 

  실리이만이 어려서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읽고서 이를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다짐을 했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이 발굴작업에 뛰어든 것입니다. 이미 기원 전에 있었던 이야기이고, 수 천 년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적을 찾는 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한강에서 바늘 찾기가 되었을 것인데 많은 학자들의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수많은 돈을 쏟아부어 그 흔적을 찾아내는데 성공했고 나름 충분한 성과를 거둔 걸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그때 실리이만이 찾아 낸 유적들이 실제로 트로이 전쟁 당시의 것은 아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고, 계속 이어진 발굴로 인해 트로이에는 여러 시대의 유물이 층층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이 트로이 유적은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표지판에 그 유물들이 어떻게 다른지가 설명이 되어 있지만 한국어로는 되이 있지 않아서 차이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를 돌아보면서 느낀 거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에더 저런 돌담이나 유적이 곳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전부 헐어서 밭을 만들고 훼손시켰으니 이젠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제가 자란 오서산 아래에도 누가 쌓은 것인지 모르는 저런 형태의 돌담이 있었는데 목장을 만든다고 다 헐어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시국가가 있던 곳은 다 땅이 풍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넓은 분지들이 많은데 이게 다 도시국가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특히 트로이는 넓은 땅과 바다를 끼고 있으니 일찍 발달했던 곳이 틀림이 없을 겁니다.

 

 

 

 

 

 

 

 

 

 

 

 

 

 

 

 

 

 

 

 

 

 

 

  우리 최해성 가이드는 트로이는 아무 볼 것도 없다고 했지만 제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데와, 히에로폴리스, 에페스와 같이 왜 여기가 고대 도시가 설 수 있었는지를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흙 속에서 나오는 유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히 다루다보면 그게 대단한 유적지를 찾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트로이 유적에서 생뚱 맞게 생각된 건, 근래에 만들어다가 세워 놓은 목마였습니다. 그 목마 속에 50 명의 정예부대가 숨어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여기 목마는 시늉만 낸 거라 오히려 그게 더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다르다 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랍세키로 갔고 거기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스탄불로 갔습니다.

 

 

 

 

 

 

 

 

 

 

 

 

 

 

 

 

 

 

 

 

 

 

 

 

 

 

 트로이를 출발하여 우리는 배를 타고 이스탄불로 가기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달렸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61킬로미터이지만 폭은 1~6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깊이는 55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81미터이다. 이 다르다넬스 해협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양쪽으로 나누는 바다입니다.

 

 

 트로이 전쟁의 무대였던 고대의 트로이아는 해협의 서쪽 입구 아시아 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을 위해 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에게 이 해협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예로부터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전략요충지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 트로이도 동안(東岸)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렸고, 그 이후에도 이 해협은 흑해 연안의 식민도시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상업상의 요로(要路)였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지역의 랍세키에서 유럽지역의 갈리폴리로 차를 탄 채로 건넜는데 여기 배들은 앞뒤가 같어서 배를 부두에 댈 때에 아주 편리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한 시간이 넘게 달려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 메뉴가 거기 말로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 말로 하면 고등어구이였습니다. 고등어구이 백반이라고 할 수가 없던게 고등아 반 마리 구이와 밥 조금, 빵과 샐러드만 나왔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다들 고등어구이를 남기지 않고 다 먹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과 중국인들도 여기에 와서는 밥에 대해 군소리없이 다 맛있게 먹었고, 서양인들도 잘 먹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조금 적은 게 아쉬웠지만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밥을 먹고는 잠시 바람을 쐬고서 바로 이스탄불로 달려 갔는데 가는 길 주변의 구릉과 밭들이 넓고 기름져 보여 그게 부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