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Hierapolis-Pamukkale)

2015. 2. 1. 21:10시우의 여행기

 

  터키 여행에서 카파도키아와 함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요한 곳이 '파묵칼레'입니다. '파묵'은 '목화(면화, 綿花)'를 의마하고 '칼레'는 '성(城)'을 의미하는 말이라 그냥 우리 말로 옮기면 '목화의 성'입니다. 목화의 성이라는 말 그대로 여기는 목화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이 깊은 곳을 얘기하라면 여기 파묵칼레였습니다.

다만 제가 인상이 깊었다는 건, 파묵칼레가 아니라 파묵칼레의 옛날 도시국가였던 '히에라폴리스'입니다.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와 분리할 수가 없는 곳인데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 국가에 파묵칼레가 붙어 있는 형상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건설이 되었다는 '도시 국가'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국가 형태입니다.

 

 인도의 성인 간디가 주장했던 공동체마을을 만들어 자급자족을 하면서 서로 남는 것을 바꾸자는 얘기를 이 도시 국가에 적용하면 딱 좋을 거 같기 때문입니다. 인구 10만 내외의 작은 나라들로 세상이 구성이 되고 그 10만이 생산하는 것 중에서 부족한 것은 다른 데서 가져오고 남는 건 부족한 곳에 주면 서로 크게 싸울 일도 없고 복잡한 세상이 될 거 같지도 않습니다. 물룬 현실불가능한 얘기지요,,,,

 

 토레스 산맥을 넘은 게 아니라 비스듬히 타고 지나면서 본 농촌 모습들입니다.

 

 

 

 

 

 

 

 

 

 

 여기가 파묵칼레 온친입니다. 버스에서 밖을 보고 찍었습니다.

 

 

 

 

 

 

 

 

 유적의 잔해들이 널려 있어 안타깝습니다.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Hierapolis-Pamukkale)는 자연 현상을 통해 멋진 경관이 형성된 유적이다. 샘들에서 광물화된 온천수가 넘쳐흘러 형성된 못과 계단 형태 지형의 멋진 자연 경관 속에 훌륭한 그리스-로마식 온천 시설을 갖춘 히에라폴리스가 조성되어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기념물들은 초기 기독교 건축물 단지의 우수한 사례이다. ‘목화의 성을 의미하는 파묵칼레는 단층을 뚫고 나오는 온천수의 칼슘 퇴적물이 형성한 독특한 지형지물(地形地物)들로 만들어진 진귀한 광경 때문에 터키 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광물의 숲, 석화 폭포, 거대한 천연 휴게실의 단층 연못 등이 바로 그러한 광경에 포함된다.

 

뜨거운(섭씨 35) 물이 지형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고대인들은 2세기 후반에 이곳에 온천을 만들었다. 히에라폴리스의 역사는 소아시아 반도의 다른 많은 헬레니즘 도시들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129년에 로마 인들에게 점령당한 히에라폴리스는 새로운 통치자들 아래에서 번영했다. 이곳은 아나톨리아 인, 마케도니아 인, 로마 인, 유대인들이 뒤섞여 지내는 국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온천으로 와서 물을 가져갔는데, 이 물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온천수의 치유력은 거대한 온천수 분지와 수영장 등 다양한 온천 시설을 통해 활용되었다. 물을 이용한 치료법이 지역 신앙의 맥락에서 발달한 종교 관습과 더불어 생기기도 했다. > 인터넷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유적과 유물입니다.

 

 

 

 

 

 

 

 

 

 

 

 

 

 

 

  여기 모습이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입니다.

 

<유해한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 신전이 세워져 있다.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은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바치는 의식과 희생 제물을 묘사한 멋진 프리즈(frieze)로 장식되어 있다. 대형 공동묘지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장례 풍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히에라폴리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도 빌립보(Philip)87년경에 도미티아누스(Domitian, 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한다.

 

고대 프리기아 파카티아나(Phrygia Pacatiana)의 주요 두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주교구였던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건축물로는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건축물은 순교자 성 빌립보 기념 성당(martyrium of St Philip)이다. 웅장한 계단 위에는 공간 구성이 독창적이고 평면이 팔각형인 훌륭한 건물이 있으며, 절벽에 세워진 요새는 히에라폴리스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 주고 있다. > 인터넷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온천도시로 번성했던 히에라폴리스는 지진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80%가 사망 실종이 되었고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냥 땅 속에 묻히고 밀았습니다. 그랬다가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영국이 미국에서 면화수입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대안으로 찾은 곳이 여기 카묵칼레 였다고 합니다. 그때 철도를 놓았는데 철도 기술자 중에 유적에 관심이 많았던 한 젊은이에 의해 여기가 발견이 되었고, 이탈리아 학자가 발굴을 시작하여 오늘날 옛 도시의 흔적과 유적이 정비되고 있습니다.

 

 

  온천에 발을 담기 위해(족욕만 가능해서,,,,) 신발을 벗어놓고 온천지역으로 들어갑니다.

 

 

 

 

 

 

 

 

 

 

 

 

 

 

 

 

 

  저 하얀 석회암 위로 온천물이 철철 넘쳐야 제대로 된 모습일 건데 겨울에는 수량이 적어서 물을 흘려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티비에서 본 파묵칼레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실망이 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신발을 벗어 놓고 걸을 수는 있어서 들어가봤습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지형이 중국의 황룡 구채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는 사철 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규모는 여기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신발에 양말을 넣어 놓고 다녀오면 양말이 다 없어진다고 하는데 고양이가 주범이라고 합니다. 잘못하면 미끄러워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족욕을 하던 지역을 벗어나서 그 곁으로 가서 찍은 사진인데 이쪽이 더 좋았습니다.

 

 

 

 

 

 

 

 

 

 

 

 

 

 

 

 나중에 가이드가 알려주지 않은 반대쪽에 갔더니 거기는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을 담기에도 충분햔 양의 온천수가 흐르고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발을 담그지는 못했습니다. 이쪽의 모습은 그런대로 파묵칼레의 한 모습이 되는 거 같아서 사진으로 열심히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아가씨는 분명 한국사람입니다. 그 옆에 남자친구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가장 부러운 건, 역사적 유물도 아니고 온천도 아니었습니다.

저 땅,,,, 저 넒은 땅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이날 밤에 파묵칼레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우리나라 시골 읍단위 장터 정도였습니다. 여기서는 석류와 오렌지를 현장에서 직잡 짜주는 쥬스가 일품인데 한 잔에 우리 돈으로 500원입니다. 다들 그걸 많이 마시겠다고 벼르던데 가서 마셔보니 한 잔이면 더 마시기도 어려웠습니다.

 

 근처 술집에 갔더니, DJ가 우리 노래를 정말 잘해서 놀랐습니다. 우리 말 발음도 정확하고 음정박자도 우리 누구 보다도 잘 하여 처음으로 팁을 주고 나왔습니다. 우리 말과 터키 말이 비슷하다는 연구가 많은데 정말 비슷합니다.

 

터키는 금주국가이지만 술은 만듦니다. '에패소'맥주가 있고 '예니락크'라고 하는 보드카 종류의 술이 있습니다. 이 예니락크를 처음 마셔봤는데 술잔에 물을 붓고 술을 조금 넣은 뒤에 얼음을 넣어 마십니다. 물에 술을 타면 색이 우유와 비슷한 색으로 변하는데 이를 '아슬란(사자?)의 눈물'이라고 한답니다. 술 맛이 무슨 소주에 맥소롱을 탄 거 같다고 하는데 그말을 들으면서 이 중에 정말 소주에 맥소롱을 타서 마셔 본 사람이 얼마나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소주에 맥소롱을 탄 걸 마셔 본 사람인데 그 맛하고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안주는 양갈비를 시켰는데 양갈비 1kg에 우리 돈으로 5만원 정도 합니다. 거기 종업원의 말로는 네 명이 1kg을 가져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저녁을 먹었고 또 배가 불렀기 때문에 2kg 만 시켰고 그것도 나중에는 조금 남은 정도였습니다.

 

 대학의 은사님 중의 한 분이 알타이어연구에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생전에 여기 한 번 오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터키 땅에 와서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터키 말과 우리 말이 비슷하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라고 하셨는데 와서 보셨더라면 정말 더 좋은 연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