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탁스클럽에 올린 작별 인사

2009. 11. 29. 21:57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사진기와 렌즈

 

펜탁스를 정리하며

 

1. 들어가는 이야기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를 참 쉽게 하지만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저의 일이겠지요. 2009년의 11월 29일 저녁에 ‘펜탁스 사진기'라는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저는 지난 20여 년간 써 왔던 펜탁스 사진기를 정리했습니다. 20년이 무어 기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저와 만난 펜탁스 사진기와는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래 정들었던 사진기와 렌즈를 떠나보내는 심정은 집에서 식구처럼 기르던 소를 내다 파는 것만큼이나 가슴이 시린 일이었습니다.

 

2. 펜탁스와의 만남

1987년 4월 중순 어느 날, 학교로 찾아 온 동원광학 외판원의 말을 듣고서 처음으로 펜탁스 ME-SUPER와 수퍼 렌즈 35-70/3.5-4.5 렌즈를 24개월 할부 45만원에 구입했습니다. 그 때 초임교사 한 달 봉급이 30만 원 쯤 할 때였으니 그때 사진기를 산다는 것은 아주 큰 맘을 먹지 않으면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시골의 100평하는 밭 값이 40만 원 쯤 했고 강서구 등촌동의 연립주택 20평형이 500만원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사진기가 비싸다고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사진기 값이 쌌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사고 나서 한 달 쯤 지나 알고 보니 제가 산 사진기와 렌즈는 남대문 점포에서 30만원이면 살 수 있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수업료를 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수업료 치고는 무척 비쌌고, 잘 알지 못하는 분이 곁에서 부채질하는 바람에 그렇게 바가지를 쓴 사람이 여섯인가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온 아남정밀의 외판원은 그때 니콘 FM2를 55만원에 준다고 하였지만 이미 사진기를 구입한 뒤라 그 사람은 한 대 정도 팔고 갔을 겁니다.

그 사진기와 렌즈 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그해 여름방학 때 미도파백화점에 갔다가 K마운트 비비타시리즈원 70-210/2.8-4.0 렌즈를 다시 45만원에 구입했는데 그것도 두세 달 뒤에 알고 보니 미도파 건너편 미광사에서 18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소비자보호원에 제소를 했더니,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고, 비싸게 사서 물리고 싶다면 물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간단하게 되는 일이 아니어서 그냥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렌즈의 성능에 꽤 만족해서 더 불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사진과 사진기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월간 사진』과 월간 『사진예술』, 『사진 291』 등 국내에서 나오는 사진 잡지를 다 사서 보며 사진과 사진기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배운 것이 펜탁스 사진기는 프로들보다 마이너들이 쓰는 기기라는 것도 알았지만 제가 펜탁스 사진기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3. 가보카메라와의 인연

제가 사진기를 늘 들고 다니기를 좋아했지만 이렇게 오래까지 사진을 취미로 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1986년에 서울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시 1988년 서울올림픽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진과 사진기에 엄청 관심을 두었고 삼성항공, 삼양광학, 동원광학, 아남정밀 등의 광학업체들이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사진기와 렌즈 선전에 열을 올렸고 이제 사진기는 가정마다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시욕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 최고급 사진기를 사는 데에 열을 올렸고, 저도 그런 틈에 끼여 사진기를 바꾸고 렌즈를 바꾸느라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 와중에서 ‘가보카메라’라는 점포와 인연을 맺게 되어 실로 생각지도 못한 호강을 누리면서 사진기와 렌즈를 만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보카메라는 늘

『월간 사진』에 광고를 내었는데 돈을 내고 낸 것이 아니라 가보카메라가 당시 『월간 사진』클럽 서울지부였기 때문에 촬영 공고 등을 내느라 그 잡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서로 공생관계였던 것이지요... 우연히 종로 3가를 지나다가 ‘가보카메라’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별로 친절해 보이지 않는 40대 중년의 사장님이 제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형식적인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 사장님이 따라 나와서는 제가 고향을 물었습니다. 어디라고 했더니, 자신은 그 옆 동네라고 하면서 반갑다고 나중에 소주라도 한 잔 하자고 해서 갑자기 친근감을 갖게 되었고 한두 번 나가다보니 나가기만 하면 늘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하자고 붙잡아서 가보카메라에 나가는 날은 술을 마시는 날이 되었고, 술이 생각나면 가보카메라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4. 펜탁스 사진기와 렌즈

펜탁스를 쓰면서 딱 한 번, 기종 변경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왜 펜탁스를 쓰느냐면서 가보에 얘기해서 니콘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들을 하도 많이 해서 한 번 그 얘기를 사장님께 꺼낸 적이 있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다 똑 같은 일제 사진기와 렌즈인데 바꿔야 손해만 본다고 그냥 쓰라고 하셔서 그 뒤로는 바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가보에 들어오는 펜탁스 사진기와 렌즈는 안 써 본 것이 없습니다.

처음 시작은 ME-SUPER였는데, 그것을 블랙으로 바꾼 것부터 시작해서 MX, KX, K2, K2DMD, LX, PROGRAM A, SUPER A, SFX, Z-5, Z-1P, Z-20, MZ-3, MZ-S, 펜탁스645, 펜탁스67 등 제가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써봤습니다. 그 중 LX 사진기는 서울 사진기점에서 이름을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적에 구해서 써보다가 팔고 또 사고, 팔고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당시 예지동 김카메라에 가서 마운트를 라이카 R로 개조했는데 지금 서울에서 어느 분인가가 잘 쓰고 있을 것입니다. Z-1도 Z-1P와 바꿔 보았고, 은색 밖에 없어서 그것을 구입했다가 다시 블랙으로 바꾸느라 또 돈을 더 준 적도 있습니다.

렌즈는 그야말로 말로 다하기가 어렵지만 타크마 렌즈부터 시작해서 SMC-K, SMC-M, SMC-A로 바꾸느라 들어간 돈은 승용차 몇 대 값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15/2.8 A를 비롯해서 17/4.0 K, 16/2.8 A의 어안렌즈 20/4.0K, 24/2.8m A, 28/2.8m A, 50/1.4m A, 50/1.2K, A, 50/4.0K, 50/2.8A, 85/1.8K, 100/4.0K, A, 120/2.8M, 135/2.5K, 150/3.5m, 200/4.0m, A, 300/4.0K, 24/2.0FA, 50/2.8F, 85/1.4FA, 100/2.8F, 200/2.8FA, 300/4.5F 등의 단초점 렌즈도 더 깨끗한 것이 나오면 바꿔서 쓰고, 또 바꾸고 하느라 들어간 돈이 부지기수였고, 줌 렌즈는 오리지널로 24-50, 24-35, 28-50, 28-80, 35-70, 35-105, 70-150, 70-210, 80-200 등 셀 수 없이 많이 구입하고 바꾸고 했습니다.

펜탁스645는 사진기를 새 것으로 산 것인데 제가 새 사진기를 산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35, 45, 55, 75, 120, 150, 200, 300의 렌즈를 갖춰서 쓰다가 오래 전에 정리했지만 펜탁스67은 새 것 같은 중고를 구입하여 현재 아사나 30/3.5, 디스타곤 40/4.0, 디스타곤 50/4.0, 플래너 80/2.8, 타쿠마 135/4.0, 텔렛200/4.0, 루빈나 500/5.6 반사 등 일곱 개의 렌즈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부 펜탁스 SMC 45, 55, 75, 135, 200, 300 의 렌즈를 썼습니다.

제가 자만에 빠져 하는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펜탁스 사진기와 렌즈를 저만큼 많이 써 본 사람은 없을 거라는 단언을 감히 합니다. 그렇게 많이 썼으면서 무엇을 했느냐고 되묻는다면 드릴 말씀은 없지만 펜탁스는 지난 20여 년간 제 분신이었습니다.

 

5. 사진기의 성능, 렌즈의 성능

저는 솔직히 20년을 사진을 찍어왔지만 어떤 사진기가 더 좋다, 어떤 렌즈가 더 성능이 좋다는 말에 별로 수긍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느 렌즈로 찍은 것인지 차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근래에 라이카 R 사진기와 렌즈를 쓰고 있지만 이것들이 펜탁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만듦새에서는 독일제가 일제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것 외는 더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다시 펜탁스를 쓴다면 수동기기 중에서는 K2DMD를 갖고 싶은데 이 기기도 세 번을 샀다가 세 번을 팔았습니다. 여기에 24-35/3.5 줌 렌즈와 50/1.4, 50/2.8마크로, 120/2.8 이 세 개면 다른 것이 더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20/4.0과 200/4.0 정도가 추가되면 충분할 것입니다.

 

6. 펜탁스를 정리하며

그동안 남들이 디카로 바꿔 탈 때에 저도 삼성의 ZX-10을 구입해서 써 봤지만 아무리 정을 붙이려 해도 필름사진기만 못 했습니다. 남들이 다 디카로 갈 때에 혼자서 구식 사진기와 렌즈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부담이 되어서 많이 정리하고 MZ-S와 20-35/4.0, 28-80/3.5-4.5, 50/2.8, 135/2.8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수동 서드파티 렌즈로 300/5.6반사 렌즈가 하나 더 있었는데 내일로 다 정리가 됩니다. 사기를 당해서 갑자기 돈이 필요한데 그래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가격이 저렴한 펜탁스 사진기와 렌즈라고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펜탁스는 펜탁스67과 50, 80, 135, 200의 렌즈 네 개, Z-20 사진기와 28-80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제가 사진생활을 하는 데 충분합니다.

제가 제집 드나들 듯 했던 30년 전통의 가보카메라는 50년 전통을 맞이하면서 충무로로 옮겼지만 시대의 조류에 밀려 몇 달 전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저를 친동생보다 더 아껴 주시던 사장님은 점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은퇴하신 지가 벌써 5년이나 지났습니다. 동생 되시는 분이 물려받아 고군분투했지만 이제 문을 닫아 가보카메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사진기를 손에서 놓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더라도 지난 20여 년간 저와 함께한 펜탁스 사진기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종원 님이 펜탁스클럽을 처음 만들었을 때, 두어 번 만나서 정담도 나누었고 펜탁스 사진기를 가진 사람들끼리 깊은 유대감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펜탁스클럽도 너무 비대해져서 예전의 그 느낌은 아닙니다. 이것이 발전이고 이것이 시대 조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매일 하루에 몇 번씩 우리 펜탁스클럽에 들어와서 글도 보고 내어놓은 기기도 보는 재미를 가졌습니다. 이제 저는 더 팔 것도 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자주 여기 들어와 여러분들의 열정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펜탁스클럽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마루 이영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