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카메라(1)

2011. 2. 26. 18:00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사진기와 렌즈

 

 

 

 

세상의 인연은 참 묘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삼생의 업으로 인연이 된다고 하지만,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인연으로 사람의 관계와 세계가 바뀔 때도 많다. 내게도 그런 행운이 있어 스스로 ‘사진인’이라고 자처하는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엉뚱한 데서 출발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재학할 적에 고전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그 쪽을 주로 공부했었다. 그때 고전문학을 담당하신 교수님 중에 노강 박노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이미 고희가 가까우신 연세이셨지만, 탁본(拓本)에 대해서는 아주 열정적이시며 독보적 위치에 서 계셨다. 노강 선생님께서 탁본 가실 적에 도구를 챙기는 것이 내 몫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찌 그리 귀찮았는지……. 게다가 나는 손재주가 없어서 여러 번을 따라다녀도 정교하게 탁(拓)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말씀은 ‘여자가 얼굴에 분 바를 때 콤펙트하는 자세로 하면 된다.’는 것이었지만, 내게는 이것이 영 뜻대로 되질 않았다. 졸업 후에는 우리 학교 문예반, 뒤에는 우리 반 학생들을 조수로 끌고 다녀 내가 잔심부름할 일은 없어졌지만, 탁본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한여름에 산에 오르거나 나무숲을 헤쳐 가며 다니려면 꾀가 나서 ‘사진으로 찍으면 될 일을 왜 어렵게 탁을 하나’ 하고 사진기를 꿈꾸게 되었다. 사진기를 사서 사진을 찍어보니 탁본과는 비슷도 아니한 것이었고, 사진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것도 탁본으로는 식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나는 사진에 한발 깊숙이 빠진 뒤였다.

사진기를 사 가지고는 아이들과 다니다가, 1988년 8월에 우연히 『월간 사진』이란 사진 잡지를 보고는 사진 클럽들이 많음을 알았다. 그 잡지에 나온 여러 사진클럽 중에 ‘월간 사진 서울지부’로 ‘가보카메라’가 광고 문안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내게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이미 사진에 관한 책 여러 권 읽었고, 서점에 있는 사진 서적들 내용이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사진클럽에 들어가 무엇을 더 얻으랴 싶었다. 그래서 별 관심 없었고 그저 우리 사진반 끌고 돌아다니는 것이 내 사진 찍기의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1989년 3월 종로 3가에 나갔다가, 잡지에서 봤던 가보카메라가 거기 있길래 들어가 봤다. 이 우연한 발길이 사진에 관한 내 삶의 방향을 틀어 놓게 된 것이다.

가보카메라. 그때 잡지에 내가 본 문구는 ‘30년 전통의 가보카메라’였다. 종로3가 지하철 역 종묘 방향으로 나오면서 단성사 쪽으로 몇 발짝만 옮기면 안경점과 함께 사진기점이 있었고 거기가 ‘가보카메라’였다. 지금은 60세 가까운 연세지만 그때는 40대 후반의 우리 회장님, 최운철 사장이 거기 있었다. 친절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장사의 냄새도 나지 않는, 작은 키에 약간 통통한, 앞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배도 조금 나온 수더분한 양복 입은 신사. 그날 나는 렌즈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고, 사장님은 지극히 사무적인 대답으로 일관했다. 얘기 끝에 아무 것도 안사는 것이 미안해서 ‘월간 사진 서울지부’ 클럽에 가입하겠다는 말을 하니까 입회원서를 내어주시고 내가 쓴 원서를 받아보더니 “아, 홍성이시네. 나는 덕산 사람이오.” 라고 했다. 그것이 오늘의 질긴 인연으로 연결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90년이 넘어서면서 나는 사진과 사진기에 대한 모든 것은 최운철 사장님과 의논하게 되었고, 그후 사장님과 사진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문제까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요즘은 최운철 사장님이 자리를 자주 비우고 동생인 최광운 님이 거의 도맡아 일을 본다. 하지만 이 형님도 전혀 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다. 말도 별로 없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겨우 하고, 그렇다고 늘 미소 띤 얼굴도 아니다. 두 분이 다 장사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어 나가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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