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 토끼야

2012. 2. 21. 18:10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오서산은 큰 산이다. 지금은 큰 나무가 없고 작은 잡목만 많아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민둥산이지만 예전에는 호랑이, 늑대, 여우, 노루, 오소리 등 많은 산짐승이 살았던 아주 큰 산이다. 지금은 금북정맥이라고 하지만 예전엔 차령산맥으로 불리었고 그 끝을 장식하여 충청 서해안에 우뚝 솟아 있다. 금북정맥을 역()으로 보면 청양, 공주, 진천으로 해서 안성 칠현산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오서산은 충남에서 두 번째로 높고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서해안에서는 뱃길을 알려주는 좋은 징표가 되기도 한다지만 산에 나무가 없고 이름난 절도 없어 크게 자랑거리는 못 되고 있다. 그래도 오서산 아래 사람들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고 이 산에 얽힌 추억을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을 거다.

 

오서산이 민둥산이 된 것은 공덕재까지 차가 들어가서 숯을 실어낼 정도로 숯을 만드느라 나무를 베어냈고, 산의 소유가 조선 황실의 것으로 되어 있으니 해방 직후 땔감으로 쓰고 재목으로 쓰기 위해 너도 나도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낸 탓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산에서 살던 짐승들도 터전을 잃어 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갔거나 잡혔을 것은 뻔한 일. 내가 어릴 때는 이미 오서산에 노루, 오소리도 드문 짐승이 되어 버렸고 그저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산토끼뿐이었다.

 

산토끼는 오서산에까지 가지 않아도 많이 있었다. 아주개 북망산으로 이어진 빈정골이나 앙산, 그리고 용배의 우리 산에서도 자주 눈에 띄었다. 광제 위쪽이나 참뱅이, 안골 등도 오서산과 연결되어 있어 동네 근처까지 산토끼들이 내려오곤 했다.

 

그래서 조그마할 때부터 토끼 잡는다고 산에 자주 갔었다. 용배에 있는 우리 산은 내가 다섯 살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구입했다. 땅이 척박하여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지만 15천 평인가 되어 꽤 넓은 편에 속했다. 나무가 없어 비가 많이 오면 골이 생길 만큼 벌건 황토가 드러나 보였다. 이런 민둥산을 아버지가 머슴 아저씨, 당숙들과 자주 손을 봐서 나무도 심고 골에 돌을 쌓아 흙이 유실되지 않게 하시어 점점 나아졌었다.

 

나는 용배 산에 다니기를 좋아했다. 용배란 이름이 용 바위가 줄어서 된 말이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산 아래 맞은편 큰 냇가에 용 바위가 있어 여기 지명이 용배가 되었다는 거였다. 용 바위는 지금 가서 보면 너무 초라해 도저히 용이 살았을 것 같지가 않은 곳이다. 예전에는 무척 컸으나 어느 해 큰 비가 왔을 때 위에서 쓸리어 온 자갈들이 바위를 덮어 초라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용 바위는 있어도 용에 대한 전설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오서산에 이름이 있는 바위들은 대부분 무슨 전설을 가지고 있어 용 바위도 무슨 얘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다녔다. 그때는 산토끼가 나타나면 내가 놀라 넘어질 때였고, 조금 더 커서야 작대기 같은 몽둥이를 들고 토끼 잡는다고 돌아다니곤 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할아버지 가묘(假墓)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가묘에 잔디를 심어 놓고 아버지가 자주 들러 보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겨울이면 산에 자주 갔다. 할아버지 묘소 근처에 아버지 묘소도 있었다. 내가 무슨 효를 하기 위하여 어른들 산소에 자주 간 것은 아니고 그저 몰래 나무하는 사람이 없나 살피고 그냥 둘러보기 위해서 다닌 거였다.

 

겨울에 토끼를 잡는다고 다녔지만 사실은 눈먼 꿩을 주우려고 다녔다. 토끼는 늘 눈에 띄어도 빨리 달아나 잡을 수가 없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번쯤은 약을 먹고 죽은 꿩을 주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산보다 더 아래인 앙산 쪽에다가 꿩 약을 놓는 사람들이 있어 그리로 가면 욕을 듣지만, 우리 산에는 그런 것을 놓는 사람이 없어 가도 괜찮았고 간혹 운이 좋으면 멀리 날아와서 죽은 꿩을 주울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서야 토끼를 잡으려면 덫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찾아서 아주 가느다란 철사로 올가미를 만들어 여러 개 설치해 놓으면 토끼가 거기 걸린다는 거였다. 대충 얘기를 듣고 배워서 열 개쯤 되는 올가미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집 개를 끌고 조무래기들과 용배 산에 자주 갔다.

 

토끼 똥을 찾아서 그 언저리 나뭇가지에 잘 보이지 않게 올가미를 놓고 토끼가 다른 곳으로 피해 갈까봐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올가미 설치한 곳만 남겨 두고 길을 막아 놓았다. 이것을 설치해 놓고는 날마다 산에 갔지만 토끼는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토끼가 있는 것을 보고 개와 같이 쫓았으나 우리 집 개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토끼는 뒷다리가 길고 앞다리가 짧아 위로 올라가는 길은 잘 뛰어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못 뛴다고 들었지만 우리 개는 아래로 도망가는 토끼조차 못 따라 가는 거였다.

 

조금 더 커서는 오서초등학교 배구 네트를 가지고 산을 누볐으나 토끼를 잡아 본 기억은 없다. 그릇 속에 들어있는 고기나 잘 잡는 내가 산토끼를 잡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지만 그 시절에는 먹을 고기가 흔하지 않다보니 토끼 잡을 생각을 다 했던 거다.

 

초등학교 6학년 때 2학기가 되면서 우리를 4학년 때부터 담임을 했던 선생님이 광천중학교 미술교사로 가시고 젊은 분이 담임을 맡았다. 먼저 계셨던 담임선생님은 애들을 잘 두들겨서 애들이 꼼짝을 못했으나 새로 맡은 분은 그렇게 하질 못했고, 해방된 분위기에서 우리 6학년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보니 학교 수업을 받다가 중간에 살짝 빠져 나가 놀다 들어오는 녀석들이 대여섯이 넘었다.

 

눈이 많이 오고 몹시 춥던 어느 날, 난로를 안 피워준다고 연통을 발로 차서 쭈그려 놓고는 토끼몰이를 간다고 여남은 녀석들이 도망을 나갔다. 나는 반장이라 교실에 남아 있어야 했지만 나가는 애들에게는 내가 같이 가야 힘이 되기 때문에 내가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운동화를 신은 아이가 하나도 없었고 다 검정 고무신이어서 3센티미터도 안 되는 눈이었어도 산에 가서 조금 돌아다니니 발이 다 젖어 버렸다. 그 상태로 교실로 갈 수는 없고 토끼도 잡지 못 하고는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산 아래 외딴집 토끼를 꺼내 오는 거였다.

 

들키면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해야 했지만 겁 없는 아이들은 언제나 있는 것이어서 얘기가 나온 뒤에 실행에 옮겼다. 나는 그냥 산에 있었고 아이 둘이 신발을 거꾸로 신고 가서 토끼 한 마리를 꺼내 왔다. 발자국이 표가 안 나도록 집에서 나온 것처럼 한 거다. 토끼는 산에 가져와서 껍질을 벗겨내니 산토끼인지 집토끼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껍질을 벗긴 채 우리 집에 가져와서 산토끼를 잡았다고 끓여 먹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수업 중에 도망을 쳤다고 교감 선생님께 무척 많이 맞았지만 우리에겐 큰 비밀이 있어 즐겁기만 했다. 맞는 거야 아주 면역이 되다시피 했으니 두려울 것도 없고 무엇인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끼리끼리만 가지게 된 것이 애들을 결속하는 역할을 했던 거였다.

 

그 주인이 알면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오서산 아래에서 했던 유일한 토끼 사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