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2012. 2. 21. 18:1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겨울철이 되면 아이들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놀이 중의 하나가 쥐불놀이였다. 밖에 나가서 썰매를 타다가 추우면 논둑 아무 곳이나 불을 놓고 쬐면서 추위를 달래야 했다. 이것은 아무런 기구가 필요 없지만 성냥만은 꼭 있어야 했다. 우리 어릴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도 겨울에는 성냥을 가지고 다녔다. 학교에 가져간 것이 아니라 썰매를 타러 나갈 때만 가지고 갔던 거다. 다른 계절에는 풀에 불이 붙지 않아 아무도 안 했지만 겨울에는 냇가나 논가에 불을 많이 놓았다. 얼음판에서 추위를 이기기는 불이 가장 나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성냥을 가지고 다니면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줄로 알겠지만 그 때는 겨울철에 성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물론 예전에도 담배를 피우는 애들이 있었고, 심한 경우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끼리끼리 담배를 물고 폼을 잡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청소년 흡연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시절이라 성냥에 대해서는 관대했었다.

 

쥐불놀이를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깡통이다. 지금은 통조림이 흔해서 깡통이야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가 있지만 우리 어릴 때는 시골에서 깡통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천까지 나가서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져서야 구할 수 있는 귀한(?) 거였다.

낮에는 논둑에 불을 놓고 놀았지만 저녁에는 쥐불 깡통을 돌리면서 놀아야 제 맛이 났다. 지름이 12센티미터쯤 되고 깡통의 높이가 20센티미터쯤 되는 것이 가장 좋았으나 그런 깡통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먼저 주워오려고 애를 썼다. 깡통의 밑과 옆 1/3지점까지 못으로 촘촘하게 구멍을 뚫고, 깡통 위에 가는 철사로 50센티미터쯤 되게 줄을 매달면 이게 쥐불깡통이다. 여기에 나뭇가지를 잔뜩 우겨 넣은 다음 아래 부분에 불을 붙이고 타기 시작할 때 철사로 된 줄을 잡고 빙빙 돌리면 연기가 퐁퐁 나면서 타들어 간다. 이렇게 타들어 가면서 깡통 속의 나뭇가지에 불이 다 붙으면 마치 불덩이가 도는 모습처럼 보인다.

 

겨울철 초저녁에는 모두 이 쥐불깡통을 돌리며 놀았다. 집 근처에서 하면 타던 불이 튀어나가 볏짚을 쌓아 둔 곳에 불이 붙을 수도 있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좋았다. 우리는 늘 빈정골 앞에 있는 논에서 놀았다. 거기는 물을 넣어 얼린 얼음판도 있어 밤에도 썰매를 타다가, 불놀이를 하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좋았다. 그때는 전기가 안 들어 올 때라 밤이 되면 어두웠지만 그래도 초저녁부터 놀다보면 얼음판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는 돼서 큰 문제가 없었다.

 

빈정골 앞의 논들은 새뜸과 꽃밭골도 가까운 곳이지만 주로 성벌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우리 어릴 때는 남자들과 여자애들이 따로 놀았기 때문에 겨울밤에 쥐불깡통을 돌리는 것은 주로 남자아이들이었다. 겨울에는 저녁밥을 일찍 먹으니까 여섯 시쯤 되면 모여서 두어 시간 놀다가 지쳐 집에 들어가도 아홉 시가 채 안 되는 시간이니 집에서도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컴퓨터는 그만 두고 집에 TV도 없던 시절이니 겨울철 기나긴 밤을 애들이 하고 놀 것이 없어서 더 그랬을 거였다. 초등학생을 벗어난 형들은 어디 빈 방에 모여서 뽕이나 칠 것이고,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팀들은 꿩 약이나 만들고 있을 시간이니, 애들은 쥐불깡통이라도 돌려야 시간이 갔다.

 

우리 어릴 적에는 축구공도 없었고, 배구나 농구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라 밖에서 노는 것 중에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돼지 오줌보로 축구를 했다는 얘기들이 많지만 그것은 운동장 같은 공간이 있어야 가능해서 기껏 공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 요즘 야구공만한 물렁거리는 고무공으로 야구를 흉내 낸 거였다. 이런 야구도 논에서 해야 하니까 가을에만 가능했다. 겨울에는 얼어서 미끄러질까봐 논에서 뛰노는 일은 할 수도 없었고 논 주인들도 애들이 논에 들어가 뛰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서초등학교가 광성리에 들어서고 운동장이 웬만큼 터가 잡힌 것이 우리 5학년 때이니 그 전에는 늘 개울가나 논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밭에는 겨울에도 보리를 갈지만 논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음 해 봄까지 그냥 비워두기 때문이었다.

 

어느 해인가는 내가 오전에 쥐불을 놓으려고 나갔다가 애들이 별로 모이지 않아서 그만 두고 산에 갔었다. 용주와 기흥이랑 가까운 몇이서 용배 산에 갔다가 왔더니 우리 집 앞에 있는 광헌이네 짚 누리에 불이 났다고 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하여 많이 타지는 않았지만 내가 불을 놓은 것이라고 해서 상당히 언짢았었다. 내가 산에 가 있던 시간에 불이 났는데도 내가 오전에 불을 놓자고 했다는 것만으로 나를 지목한 거였다. 물론 내가 아닌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쥐불놀이도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이게 언제 적부터 내려오는 풍습인지 모르지만 아이들 놀이는 정월 대보름으로 다 끝이 났다. 그러니까 쥐불깡통도 대보름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깡통을 돌리는 것은 낮에는 전혀 폼이 안 나서 밤에만 돌리다가 대보름 밤에 변소에서 쓰던 대빗자루를 태우면서 깡통은 냇물에 떠내려 보냈다.

 

보름날 밤에 대빗자루를 태운 것은 그런 오래된 빗자루들이 도깨비불이 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빗자루는 바짝 마른 대나무라 불이 붙으면 아주 잘 타고 불이 좋아 불붙은 빗자루를 휘두르면 아주 볼 만 했다. 반 가까이 탈 때까지 끝을 잡고 돌리다가는 멀리 물에 던져 버렸다.

 

대보름날 밤에 쥐불놀이가 끝나면 아홉 시에서 열 시쯤 된다. 이 시간쯤이면 많이 출출하고 놀이가 다 끝났다는 허전함에, 모의하는 것이 밥 훔쳐다 먹는 일이었다. 사실 훔쳐다 먹는다는 말은 조금 그렇지만 정월 대보름은 하루에 밥을 아홉 끼니를 먹는 날이라고 했고, 또 남의 집 밥을 먹어야 좋다고 했기 때문에 아이들끼리 작당을 해서 남의 집 부엌으로 밥을 가지러 다닌 거다.

 

정월 대보름이라고 아무 집이나 다 갔던 것은 아니고, 밥이 많이 있을 만 한 곳을 찾아야 했다. 우리 집은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만 표적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은 형들도 노렸기 때문에 먼저 가야 가져올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먼저 간 팀들이 밥을 대부분 다 털어 가서 나중에 간 팀들은 가져오지도 못 하고 누명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밥을 가져 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식기까지 가져가고, 집에서 아껴 먹는 기름병을 통째로 가져가곤 해서 말썽이 되기도 했다.

야 남의 집에 가서 무엇을 가져온다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아니 겁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냥 모이기로 한 집에 앉아 있으면 나갔던 애들이 가져오거나 들켜서 혼나고 오거나 했었다.

 

나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편이 아니었고 또 가리는 것이 많아서 그렇게 모아진 밥을 즐겨 먹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출출할 때라 안 먹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먹고 나면, 다음 날 누구네 기름병이 통째로 없어졌네, 양재기를 다 쭈구려서 가져다 놓았네, 하는 등의 얘기가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서 이제 모든 놀이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