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도 스케이트도 못 탔지만

2012. 2. 21. 18:16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지금은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컴퓨터나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덩치만 커지고 허약해졌다는 얘기를 듣는 거다. 우리 어릴 때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애들이 할 수 있는 놀이는 다 밖에서 해야 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여자들은 어떤 놀이를 하고 놀았는지 기억이 안 나나 남자들은 거의 밖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놀았다. 예전에는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고, 입는 옷도 그리 따뜻한 것은 못되었으나 겨울철에도 밖에서 하는 놀이가 대부분이었다. 그 때에 겨울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일이 썰매 타기였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탔지만 우리 시골에는 스케이트를 가진 집이 없었다. TV에서 보면 썰매도 도시 애들 것은 매우 폼이 나게 썰매에서 얼음에 닿는 부분을 특수 제작한 칼날로 만들었지만, 우리 시골은 겨우 담배 철사 아니면 유리 창문에 까는 레일 정도였다.

 

담배 철사는 여름철에 담배를 엮어 거는 굵은 철사로 지름이 5밀리미터쯤 되고 강해서 잘 구부러지지 않는 것으로 썼다. 이것은 둥근 형태라 썰매의 날로 쓰기엔 적당하지 못했지만 이런 철사가 있는 집이 흔치 않았고, 있다 해도 애들이 잘라 쓰게 하지는 않았으니 썰매가 없는 애들은 이런 철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오서국민학교가 생긴 이후로 학교 유리창에 깔려 있는 레일을 뽑아다가 썰매를 만드는 아이들이 있어, 학교 레일이 다 없어지는 소동이 있었으나 적어도 이런 짓은 성벌 아이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유리창을 들어내고 레일을 걷어낸다 해도 레일이 그리 길지 않았고, 보통 실력으로는 못 박힌 가운데를 들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짧은 레일로는 썰매를 만들어 보았자 길이가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짧은 썰매인데 성벌에서는 그런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없었다.

 

나는 영주 형이 담배철사로 만들어 준 것이 있었지만 폼 나게 만들려고 광천에서 레일을 사다가 무척 길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북선 수준으로 만든다고 크게 만들었더니 기동력이 떨어져서 쓸모가 없었다. 둘이나 셋이 타고 저으면 될 줄 알았으나 무게가 무거우니까 잘 나가질 않아서 완전 실패작으로 끝났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나는 이렇게 큰 썰매를 여럿 만들었고, 내가 혼자 타는 것도 다른 아이들 것보다 두 배쯤은 더 컸었다. 그 레일이 생각보다 싸서 실패작으로 끝나도 크게 부담이 없었다.

 

광제 애들은 비행기 썰매라고 해서 썰매 앞부분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게 작은 날개를 하나 만들어 썰매와 연결시켜 탔는데 이것도 썰매가 작아야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내가 광제에서 보고 와서 내 썰매에 비행기를 달았더니 썰매가 크고 무거워 방향을 전환할 때 잘 되지 않았다.

 

썰매보다 더 고급스런 것으로 외짝 썰매라는 게 있었다. 이것은 썰매의 날을 가운데에 하나만 댄 거였다. 그 대신 일반 썰매보다 조금 높게 만들었다. 날이 하나여서 균형을 잡지 못하면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서서 타고 일반 썰매보다 훨씬 잘 나가서 빨리 달리기 시합을 하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외짝 썰매는 그래도 고학년이 되어야 탈 수 있었다. 몸이 유연하고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이 아니면 자주 넘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외짝을 타는 것은 엄두도 못 냈었다. 그냥 외짝을 타고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썰매의 날이 높을수록 균형을 유지하기가 힘이 들어 나는 아예 이런 것을 가질 생각도 안 했다.

 

외짝 썰매보다 더 고급스런 것이 발에 묶고 타는 두발과 외발이었다. 나무토막을 둥근 삼각형으로 깎아 그 밑에 날(철사)을 한 줄 댄 것은 외발이고, 약간 네모지게 깎아 날(철사)을 두 줄 댄 것은 두발이었다. 나무를 깎아 만들다보니 너무 투박하여 스케이트를 그대로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당연히 두발보다는 외발이 고급이었고, 외발을 타는 아이들은 스케이트선수나 된 것처럼 폼을 잡았다. 이것들은 무겁기도 했지만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넘어지기 때문에 좀 나이가 들어야 탈 수 있었다. 나는 몸이 둔해서 두발이나 외발을 한 번도 타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썰매만 있다고 썰매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썰매 꼬챙이라고 부르고 광제에서는 썰매 촉이라고 부르던 보조기구가 있어야 했다. 썰매를 타고 꼬챙이로 찍으면서 몸을 앞으로 보내는 동작을 계속 해야 썰매가 앞으로 나간다. 썰매를 잘 타려면 자기 손에 딱 맞는 꼬챙이가 꼭 필요한 거다. 이 꼬챙이는 거의 해마다 만들어야 했다. 겨울에 쓰고 잘 둬도 나무가 마르면 힘을 못 써 다음 해에는 부러졌기 때문이다.

 

이 꼬챙이는 소나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다른 나무로 만들면 촉을 박을 때 나무가 잘 쪼개졌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참나무나 밤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많았고 소나무는 조금 귀하게 여겼던 때라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마다 필요해서 산에 갔지만 주로 우리 산의 것보다 남의 산에서 잘라 왔다.

 

썰매와 꼬챙이가 완성이 되면 이젠 얼음판이 문제였다. 우리 마을에는 저수지가 없고, 넓은 보()도 없기 때문에 논에 물을 대어 얼려야 겨울철 놀이판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성벌에는 물을 댈 만한 논이 없고 방깔미 앞이나, 동살뫼 앞의 논들이 물을 대기가 좋았다. 물을 대기 좋은 논이란 물을 끌어들이기 좋은 곳, 즉 냇가의 논이어야 했고, 물이 잘 안 빠지는 수렁배미이어야 겨울철에 얼음판이 유지된다. 그러나 이런 입지 조건이 좋은 논이라도 논임자가 물을 못 대게 하면 다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어느 겨울인가는 물을 대는 논이 하나도 없어 마구발치 우리 논에 물을 대려고 마을 애들이 다 동원되어 수로를 만든 적이 있었다. 거창하게 수로라고 했지만 여러 논을 거쳐야 우리 논으로 물이 들어오므로 논의 물꼬를 만져서 5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논을 따라 물을 끌어오려 한 거였다. 그러나 그 물길이 너무 길어서 내려오던 물이 중간에 다 새버려 얼음판을 만들지는 못했다. 거기다가 물이 오다가 새면서 남의 집 짚더미로 들어가 볏짚이 젖는 바람에 많이 혼나기도 했다.

 

우리 마을 같은 산골이 아닌 곳에서는 냇가 물을 가두어 얼음판을 만들기 때문에 무척 넓고 컸지만 그 대신 깊은 곳이 많아 얼음이 녹을 때는 더 위험했을 거였다. 우리처럼 논에 물을 대서 얼리면 얼음이 녹을 때라도 빠져서 죽을 일은 전혀 없었다.

 

썰매를 타다가 추우면 논둑에 불을 질러 추위를 달랬다. 그 때는 논둑을 태우는 것이 병충해를 방지한다고 해서 권장 사항이었으나 요즘은 생태계 문제가 어쩌고 해서 태우지 못하게 한다고 하니 세상은 이렇게 변하는 것인가 보다. 논둑을 태운다고 불을 놓은 것이 산으로 올라붙으면 산불로 번지기 때문에 불을 놓을 때는 무척 조심스럽기는 했다.

 

날이 풀릴 때 썰매를 타다보면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고 물에 빠지면 발이 젖는다. 그 때야 운동화가 아니고 다 고무신이라 신발은 금방 마르지만 양말이 안 말라 불을 놓고 말리기도 했다. 한번은 불을 놓고 젖은 옷을 말리던 경만이 형이 옷에 불이 붙어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한동안 불을 놓는 것이 겁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우리는 늘 나가서 썰매를 탔고, 불을 놓으며 겨울을 보냈다.

 

요즘에는 눈썰매라는 것이 있다지만 그것은 진정한 썰매가 아니다. 그냥 바가지를 타고 눈 위에서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던데 그게 무슨 썰매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