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장날

2012. 2. 21. 18:20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안면도가 고향인 흥섭이 형님과 오서산에 올랐던 적이 있다. 광천을 지나면서 형님이 하신 말씀, “나 어릴 때 꿈이 광천 장에 가보는 거였다.” 그래, 광천 장……. 옛날엔 정말 대단했었다. 지금은 갈수록 왜소해져 이게 정말 광천인지 다시 보게 되지만.

 

광천 장은 4일과 9일에 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광천 장날이면 지럭재(기러기재 : 雁峴)를 넘어 장에 가는 산 넘어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 집 마루에서 바라보면 지럭재 등성이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아침에 세수를 할 시간 때면 장에 가는 사람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럭재를 넘어와 아주개쯤 오면 사람 하나하나의 윤곽이 드러났다.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소를 몰고 떼를 지어 광천 장으로 가는 거였다.

 

아마 걷는 시간이 두 시간은 족히 됐을 것인데도 그렇게 걸어서 장에 다녔다. 그때 지럭재길은 걸어서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고 달구지는 반계로 돌아서 장곡을 거쳐 광천으로 갔다. 이렇게 일찍 장에 갔다가 우리 동네 사람들보다 또 일찍 올라온다. 길이 머니 서둘러야 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어서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침을 먹고 천천히 가도 되지만 산 너머 사람들은 우리 쪽보다 적어도 두어 시간은 먼저 나와야 했다. 청양에도 장이 서고 화성에도 장이 서지만 그래도 오서산 아래에서 장답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역시 광천 장뿐이었다. 장은 사야할 것도 많은 곳이지만 팔아야할 것도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장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 빈손으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무엇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가는 모습이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장에 가시는 분들은 대부분 곡식을 가지고 나갔다. 돈을 만들어야 물건을 살 수 있었고 돈을 만들려면 우리 시골에서는 곡식밖에 없었다. 곡식이 아니면 달걀이라도 가지고 나가야 장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그 시절에는 달걀 한줄(10)이면 상당한 돈이 되었으나 요즘은 달걀 한판(30) 값이 애들 과자 값에도 못 미친다는 거다. 닭을 내다 파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보다는 훨씬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천 장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어물전이었다. 서해안에서 잡힌 어물들이야 당연히 광천으로 왔지만 서해안에서 잡히지 않는 것들도 광천 장에 나왔다. 충청도에서 바다를 끼고 상업이 발달한 곳이 광천과 강경 정도였고 광천은 충남 서부지역의 중심 시장 역할을 톡톡히 할 때라 잔치에 쓸 큰 어물이나 건어물은 광천이 아니면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예전에 광천 장에서는 새우젓이야 뒷전이고 상어나 문어 같은 잔치 상에 오를 큰 생선들이 많이 거래되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갱개미이다. 갱개미는 홍어보다 훨씬 작지만 그 맛은 홍어에 뒤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갱개미는 삭히지 않고 싱싱한 것을 얼큰하게 무쳐야 제 맛이다. 이 갱개미와 비슷하게 생긴 가오리나 밥주걱은 맛이 많이 떨어져 한 번도 회로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때는 봄철 밴댕이가 무척 싼 것이어서 보리쌀 한 말이면 꾸들꾸들 말린 밴댕이를 반 가마니 정도 살 수 있었다.

 

밴댕이는 젓을 담거나 마늘잎을 넣고 된장으로 조려 먹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들으니 밴댕이를 회로 먹는다고 해서 적이 놀란 적이 있다. 밴댕이는 광천에서는 젓갈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했지만 광천에서는 오징어보다 꼴뚜기젓갈을 더 높게 쳤다. 아니 맛에서도 꼴뚜기젓이 오징어젓보다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집에서 즐겨 먹었던 게 갑오징어와 쭈꾸미이다. 아버지가 회를 좋아하시어 봄철 장날이면 이런 것들을 많이 사 오셨다. 갑오징어는 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데 맛은 오징어보다 훨씬 낫다. 광천 쭈꾸미는 다른 동네 낙지를 제쳐 놓고 먹을 만큼 맛이 좋았다. 천북에서 나오는 굴들도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작고 알차서 아주 각광을 받았다. 내가 지금도 다른 지역 굴을 잘 먹지 않는 것은 어려서부터 좋은 굴만 먹었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들이 꼬막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살조개도 광천 장에 가야 살 수 있었다. 그 살조개는 다른 지역의 꼬막과는 맛이 전혀 달랐는데 요즘은 보기 어렵다. 우리 지역에서는 소합이라고 불렀던 바지락도 광천 장에 가면 아주 흔한 거였다. 바지락은 섬이 아니라도 결성이나 서부, 천북 등의 바닷가에서 많이 잡혔고 큼직큼직한 것이 맛도 좋았다.

천 장에서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우()시장이다. 전국적으로 우시장이 큰 곳이 많았지만, 광천 우시장도 그 규모나 거래되는 소의 양으로 따지면 우시장 중에서 으뜸간다고 들었다. 우시장이 어물전 곁에 있어도 나는 우시장에 가 본 일이 별로 없다. 소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육촌 아우가 자주 갔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거기 가야 큰돈을 구경할 수 있었고 좋은 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역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은 달랐던 모양이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 장에 따라가는 것처럼 흐뭇한 일이 어디 또 있었을까? 홍섭이 형 꿈이 서울 구경이 아닌 광천 장 구경이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우리도 장에 따라가는 것이 그 시절에는 큰 즐거움이었다. 광천 장에 가려면 한 시간 반 가까이 걸어서 갔는데도 그렇게 따라가고 싶었다.

 

광천 장날, 광천 장에서 우리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는 구장터 다리 건너 우측으로 100여 미터 내려간 곳에 있는 '장의원' 앞이었다. 여기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길을 잃어도 이곳으로 가면 다 만날 수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볼 일이 있는 사람들도 여기로 오면 말을 전할 수가 있었다.

 

나는 다른 애들보다 장에 많이 다닌 편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장에 많이 다니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할아버지 반찬을 사느라 많이 다니셨고 집에 큰일도 많고 제사도 많아서 장 볼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광천에는 사기공장이 둘이나 있어 사기그릇도 많이 나왔다. 사기전 쪽에 가면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파는 곳이 여러 집 있었다. 그런 집들은 장날만 장사를 했었다. 거기서 사 먹는 국밥은 왜 그렇게 맛이 좋던지……. 광천에 화교 학교가 있을 만큼 화교들이 많이 살아 중국음식점이 많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장에 가도 그런 곳에는 잘 안 다녔다. 내가 자장면을 처음 먹어 본 것이 중학교 들어가서이니 그 전에는 아예 중국음식점에 안 다녔다는 얘기이다.

 

광천 고모네가 광천역 앞에서 식당을 하기 전에는 주로 사기전 근처에서 국밥을 사주시었다. 그 음식점은 설 때가 아닌데도 떡국을 파는 것이 신기했고 그것이 먹고 싶기도 했다.

 

장에 따라간다고 해서 뭐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 골목, 저 골목 어머니 손에 매달려 다니면서 사람들 틈에 길을 잃을까봐 마음 졸이기도 했고, 장에서 만나는 친척들이 반갑기도 했었다.

어물전의 비린내를 아주 싫어했지만 보지 못했던 생선의 이름이 궁금해서 쉽게 걸음을 옮기지도 못 했다. 장에 따라가지 못한 날은 장에 가신 어머니 마중을 나가는 장 마중도 추억 속에 아련하다. 비록 어머니께서 내가 먹을 것을 사오시지 않아도 봄티 고개 아래까지 가서 기다리던 그 기대감이 왜 그리 좋았던지…….

 

2년 전 설을 얼마 앞두고 우연히 전라도 담양 장에 갔었는데 얼마나 풍성하던지 옛날 광천 장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젠 인구도 줄었고 교통이 편리해져 옛날 광천 장날은 추억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