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4. 17:56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작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일요일이 닿아서 오서산으로 억새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오서산 정상의 억새 이야기는 이미 많은 지면에 소개되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오랜 시간 벼르기만 하다가 하루 날을 잡아 친구 갤로퍼를 타고 찾아간 거다. 그 때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서평택까지만 되어 있어, 아산만 방조제를 통해 현대 자동차 앞으로 해서 예산 예당저수지를 끼고 장곡으로 해서 올라갔다.
허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시기가 너무 일러서 억새가 제대로 피질 않은 거였다. 10월 말이 되어야 제대로 피는 것을 서울 근교에서 억새가 핀 것을 보고 너무 성급히 나선 게 불찰이었다. 게다가 정암사에서 쉰질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는 보수 공사 중이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차를 정암사에 세우고 등산로로 걸었더라면 나았을 것을 중간에서 돌리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도로를 따라서 땀만 바가지로 흘리며 걸은 것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그래도 오서산에 오르기 위해서 지나던 길의 코스모스가 너무 아름다워 비록 사진은 찍지 못했어도 마음만은 몹시 흐뭇했다. 예당저수지를 통해서 반계로, 다시 장곡으로 이어지는 길의 코스모스와 홍성에서 덕산으로, 덕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의 코스모스가 보기에 너무 좋아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70년대의 우리나라 시골길은 어디를 가나 코스모스가 심어져 있어 가을이면 얼마나 보기 좋았던가? 그 때는 차가 많지 않아 대부분 그 꽃길을 걸으며 눈으로 취하고 향기로 취했는데 세월 속에 시나브로 없어져 지금은 코스모스도 귀한 꽃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는 도산리에서 화계리를 거쳐 성벌, 광제로 이어지는 길이나, 성벌, 안골 오성리로 이어지는 길, 성벌에서 상풍으로 이어지는 길, 드물을 통해 광천으로 나가는 길, 오성리를 지나 담산리로 해서 광천 가는 길들이 모두 코스모스 꽃길로 화사했다.
코스모스는 한해살이 꽃이지만, 한 해만 잘 심어놓으면 해마다 씨가 떨어져 갈수록 풍성해진다. 처음에 심을 때는 아주 볼 품 없이 빈약하지만 2-3년만 지나면 무성해져서 솎아줘야 할 정도로 많이 나고 잘 자란다. 그러나 그 꽃씨가 멀리까지 가는 것은 아니어서 처음엔 꼭 모종으로 심어야 한다. 그러니까 꽃길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심었다는 얘기다.
그때는 초등학교 애들로 조직된 애향단이 있어 대부분 마을에서는 애향단이 꽃을 심었다. 그러면 왜 진작 심지 않고 우리 때부터 심었느냐? 우리 어릴 때에 비로소 본격적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던 ‘새마을 노래’처럼 새로 넓혀진 그 길들을 코스모스 꽃길로 만들었다.
그 유명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도 그 언저리에 나왔다. 내 기억으로는 60년대 후반기였던 것 같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예전엔 가을만 되면 가장 널리 부르던 노래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다들 익히어 가을만 되면 코스모스 꽃길을 걸을 때마다 부르던 노래, 가수 김상희가 부른 노래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고 사랑받는 노래는 이거 하나다.
그 시절에 초등학교 학생들을 마을 단위로 묶어 일을 하던 애향단은 왜정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나라의 옛 풍습에도 자기 마을을 위하는 아이들 모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애향단은 분명 왜정시대에 생긴 거다.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狂奔)할 때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이용하느라 만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던 거라고 생각한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미 장곡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있었기 때문에 '새마을 운동'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이 애향단은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각 마을의 꽃길은 대부분 애향단이 만든 거였다. 학교에서 나누어 준 코스모스를 가져다 심었고 여름철에 주변 풀을 깎아서 여린 코스모스가 무성한 잡초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강제성을 가졌던 활동이라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이 자기 마을을 위한 일을 한 것인데 조금 타율에 의해서 했다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학교 교실 청소도 부모가 가서 대신 해준다고 하니 참 격세지감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그 시절에는 교실 청소뿐 아니라 마을 청소와 꽃길 조성도 초등학교 아이들이 다했다. 방학 때에 많이 했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아무 때나 아이들을 동원했고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가을에 색색으로 핀 코스모스 꽃을 꺾어서 가위, 바위, 보로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놀이도 하였고, 코스모스 꽃씨를 훑어 바람에 날리는 놀이도 했었다. 그 화사한 꽃길 속을 걷노라면 여자 친구 하나 없는 것이 더욱 쓸쓸했다. 난 달밤에 코스모스 길 걷는 것이 좋았다. 바람에 한들거리며 달빛에 애잔한 꽃들은 왠지 모를 그리움에 젖게 했다.
도산리에서 새뜸을 거쳐 성벌로 오는 길에 핀 코스모스가 아주 좋았었다. 추석 무렵에 장곡에서 늦은 시간에 걸어오다 보면 달빛에 젖은 코스모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밤에 혼자 늦게 오려면 많이 무서웠지만 가을에 코스모스 길을 걸을 때는 그런 무서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예전에 영부인이었던 이순자씨가 코스모스를 싫어해서 그렇게 흔하던 코스모스가 많이 사라졌다고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서러운 사람들은 코스모스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이 꽃이 지면 또 한 해가 저문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에 그럴 거다. 힘없는 사람보다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더욱 그럴 거였다. 영부인의 힘이 그렇게 막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근래에는 코스모스 꽃길이 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꽃을 심고 가꿀 아이들이 없어서 그 꽃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만 해도 강원도 동해안에 지천으로 피던 ‘누드베키아’라는 노란 꽃은 토종이 아니라서 없애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날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토종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간혹 길가에 심어진 나리꽃이나 원추리꽃을 보지만 그것들이 꽃을 보여주는 기간은 열흘이 채 안 된다. 거기 비하면 누드베키아는 두 달 이상 꽃을 달고 있지 않던가? 채송화도 봉숭아도 다 들어온 꽃이다.
가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코스모스 꽃길도 이젠 추억으로 흘러가고 있다. 가을에 촬영을 나가다가 어디 코스모스가 좋은 길을 만나면 늘 탄성을 지르고 옛날을 생각한다. 비록 아련한 추억하나 가진 것 없지만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남상규가 불렀던 ‘고향의 강’을 흥얼거려 본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만 되면 더 추억에 젖어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온 정훈희의 ‘꽃길’이란 노래의 가사, “진달래 피고 새가 울 면은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 잊지 못해서 찾아오는 길, 그리워서 찾아오는 길……”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 꽃길 속의 사람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나는 어린 시절을 바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추억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도 한 사람쯤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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