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연밖에 몰랐다

2012. 2. 21. 18:1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겨울철이 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연을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손재주가 없는데다가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때에 따라 해야 할 것을 언제나 남보다 앞장을 서는 축에 속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져야 마음이 놓였다. 내가 이런 것들을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언제나 영주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손재주도 좋고 생각할 줄도 알아 처음 만드는 것도 알아서 다 잘 만들었다. 나하고 형은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났지만 이런 면에서는 한참 차이가 났다. 그리고 항상 형이 다 해주니까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요즘은 문방구에 가면 연의 재료를 통째로 팔고 있으니까 아이들도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우리 어릴 때는 종이만 팔았다. 보통 백지라고 불렀으나 요즘 생각하니 그게 한지(韓紙)였다. 종이 한 장에 2원인가 했고 그거 한 장이면 딱 맞았다. 연을 만들 때, 내 것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형 것도 만들어야 하니까 백지를 두 장만 사면 반은 된 것이고 다른 것은 다 형이 알아서 했다.

 

연은 종이 위에 대나무를 깎아 다듬어 붙이면 된다. 이 깎은 대나무를 연살이라고 불렀다. 연살을 만들기에 좋은 것은 그 당시에 간혹 볼 수 있었던 지우산(紙雨傘)의 우산살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예전엔 종이에 기름을 먹여서 만든 종이우산이 있었는데 이게 지우산이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1회용 우산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거다.

 

그렇지만 시골에는 우산이 아주 귀했으니 이런 지우산도 어떻게 한번 쓰고 버릴 수가 있겠는가? 여러 번 사용하다가 종이가 낡아서 비가 샐 정도가 되어야 버렸다. 이것이 나중에는 비닐우산으로 바뀌었으나 요즘은 비닐우산도 보이지 않는다. 천으로 만든 우산 하나 가격이 3000원이니 누가 비닐우산을 만들겠는가?

 

우산살은 이미 가늘게 쪼개어 만든 것이라 잘 드는 칼로 조금만 다듬으면 연살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좋았지만 우산대도 쓸 만 했다. 잘 쪼개어 다듬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른 대나무가 아니면 무겁기 때문에 연이 위로 뜨기가 어려워 반드시 마른 대나무를 구해야 했다. 쓰기 쉬운 대나무를 구하지 못하면 집에 있는 장대로 쓰는 대나무를 잘라서 만들었다.

 

다른 집에서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내가 하는 일은 대부분 큰 문제를 안 삼았기 때문에 수월했고, 상풍 할머니 댁에 대나무 밭이 있어서 필요하면 내가 가서 잘라왔기 때문에 장대 하나 없어졌다고 꾸중들을 일은 없었다.

 

대나무를 아주 얇게 쪼개어 길이를 맞춘 뒤에 연필을 깎는 면도칼로 잘 다듬어서 매끈하게 만든 연살은 머리살 하나, 허리살 하나, 중살 하나, 장살(양귀살)2, 해서 모두 다섯 개가 필요하다. 이것들은 두께와 넓이, 무게 등이 다 일정해야 나중에 기울지 않고 잘 난다.

 

연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바람이 통해야 연이 날 수 있었다. 형은 이 구멍을 아주 작게 뚫었다. 이 구멍을 방구멍이라 했는데, 방구멍이 작으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문제가 되지만 바람이 적게 부는 날에는 더 잘 날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는 작은 것이 더 쓸모가 있었다. 방구멍을 뚫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연이 직육면체라서 정 중앙을 뚫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일일이 자로 재서 맞출 수도 없는 일이지지 않은가? 컴퍼스를 동원하고 칼로 도려낸다 해도 방구멍을 정확한 원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형은 자나 컴퍼스를 쓰지 않고 종이를 아주 여러 번 접어서 가위로 오려냈다. 그런데도 펴 보면 항상 정 가운데이고 이지러진 데가 없는 구멍이 되었다. 난 지금도 이런 것들을 어떻게 형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연살이 다 깎아지면 풀을 이용해서 백지에 붙이는 작업으로 연 만들기의 반은 끝난다. 그 때는 풀을 사서 쓸 생각 자체를 못했기 때문에 형은 밥풀을 이용해서 붙였다. 밥을 한 숟갈 정도 종이에 싸서 그 속으로 연살을 몇 번 통과시키면 연살 전체에 밥풀이 잘 묻고 이렇게 해야 나중에도 떨어지지 않아 좋았다. 이렇게 종이와 연살을 붙인 다음에는 연의 상단 좌우 끝과 하단 아랫부분 가운데를 연결하는 목줄을 맨다. 이 목줄을 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세 줄의 길이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연이 하늘을 날 때 기울기 때문이다.

 

하단 아랫부분에 장살을 사이에 두고 구멍을 뚫어 줄을 매는데 이 구멍은 공수구멍이라고 하였다. 연의 뒷면에 양 귀를 연결하는 줄을 활벌이줄이라고 하고, 가운데 허리살을 연결하는 줄을 가운뎃줄이라고 했다. 이 두 줄은 바람의 양에 따라 늘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두 줄을 적당히 당겨 조이고 목줄을 연실에 연결하여 바람을 이용하여 날게 만들었던 거다. 이런 작업을 거쳐 만들어지는 방패연은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과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연이라고 하면 방패연만 생각하지 가오리연 같은 것은 연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가오리연은 만들기도 쉬웠지만 도대체 연 같은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동네에는 가오리연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형이 없는 애들이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간혹 만들기도 하였지만 어디 방패연을 띄우는 곳에 가지고 나와서 같이 띄울 수가 있었으랴…….

 

연실은 주로 명주실을 썼다. 내가 연을 만든다니까 어머니께서 예전에 쓰시던 명주실꾸러미를 주셨다. 이 실이 아주 질기고 좋아서 해마다 이것을 가지고 했다. 책에서 보면 연실에다가 유리를 매겨서 다른 사람과 연 싸움을 할 때 이용한다고 하나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 연이 더 높이, 더 멀리 올라가느냐가 관심이었지 연실을 걸어 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연실을 감는 기구를 표준말로는 얼레라고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연 자새라고 불렀다. 연 만들기보다 이 자새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 자새는 대개 작은 목재로 만드는데 4각형이나 6각형으로 만들어 멋을 부렸다. 이 자새도 제대로 만들면 두고두고 쓸 수 있는 것이지만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생나무를 베어다가 만드니 한 해가 지나면 말라 비틀어져 다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연 자세를 만들어야 했었다.

 

연은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이 자새만큼은 형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무를 다듬을 연장이 없는데다가 좋은 나무를 구할 수가 없어 해마다 한 해밖에 못 쓰는 생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래서 좋은 자새를 가진 사람이 부러웠지만 좋은 자새는 집에서 물림으로 쓰는 것들이라 어떻게 구할 수도 없었다.

 

연은 정월 보름까지만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 우리도 정월 보름이 지나면 연을 띄우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연실에 담뱃불을 묶어 연을 띄우다가 담배가 타들어 가서 실이 끊어지면 날려 낸다고 했지만 그런 기억은 없고, 설이 지나면 그냥 시들해져서 연이 집안 어느 구석에서 뒹굴다가 없어지고 말았다. 요즘은 서울에서 여름에도 연을 띄우지만 예전에는 보름이 지나서 연을 띄우면 쌍놈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그냥 흐지부지 없애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겨울이 오면 만들어 날렸다.

 

얼마 전에 용범이가 연을 만드는 것이 숙제라고 해서 문방구에서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준 적이 있지만 서울서는 연을 날릴 곳도 마땅치 않다. 대개 한강 둔치에 나가서 날리던데 연을 날리기 위해 둔치까지 나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애들이 어디 연을 날리겠다고 밖에 나가겠는가? 세상이 변하면 애들 놀이도 따라서 변하는 게 당연한 일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