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1. 18:0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면 새 새끼가 아니라 큰 새를 잡아 구워먹기도 했다. 대나무와 새끼줄로 엮어 만든 새 덫을 집 근처, 볏짚누리 앞에 놓으면 먹이가 없어 헤매던 새들이 몰려와 미끼로 달아놓은 벼이삭을 먹으려다 거기 채였다. 참새가 소더러 '네 고기 열점보다 내 고기 한 점이 더 낫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참새고기는 맛이 좋았다.
이런 새 덫을 잘 놓는 것은 단연 영주 형이었다. 나와 한 살 차이고 한 학년 위인 영주 형은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있어서 이런 것도 잘 하였다. 형이 만들어 준 덫을 놓아도 나에게는 새가 잡히질 않았다. 그냥 시늉으로만 놓아두고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였다. 그래서 형이 잡은 것을 얻어먹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우리 또래보다 조금 더 큰 형들은 어디서 빌려왔는지 가끔 공기총을 가져다가 새를 잡기도 하였다. 이 공기총이라는 것은 화약을 이용하지 않고 정말 공기로만 총알을 내보내는 것이라 큰 위력이 없었다. 게다가 생김새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 공기총은 총열에 공기를 압축하여 이 압축된 공기로 볼펜 깍지 굵기의 탄피 속에 들어있는 총알을 날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총알은 산탄이라 작은 구슬이 몇 개 들어있어 이것을 맞은 새가 죽을지 늘 의문이었다.
이런 총들은 총열 아래에 공기를 압축하기 위한 펌프 비슷한 것이 달려 있어 두어 번 쏘고는 바람을 넣곤 했다. 나는 바로 그 공기펌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미 서울에서 꿩 사냥을 온 아저씨들이 가지고 다니던 매끈하고 멋있게 빠진 영국제 맨체스터 엽총을 자주 봤던 터라 공기총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오서산 아래에 겨울이 되면 서울에서 꿩을 잡으려는 사냥꾼들이 몰려 왔었다. 그 때 총 하나에 논 몇 마지기 값이라는 보기에도 탐이 나는 영국제 맨체스터 엽총을 들고, 꿩을 날리기 위한 사냥개 -주로 포인터- 를 데리고 몇몇씩 짝을 지어 왔다. 이 사냥꾼들은 폼만 멋졌지 우리 마을 아저씨보다 훨씬 못했다. 홈다리에 군 하사관으로 20년인가를 근무하고 전역한 아저씨가 한 분 계셨는데 이 아저씨는 총이 아주 구식이라 폼은 안 났지만 꿩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서울에서 꿩을 잡으려는 사냥꾼들이 오면 우리는 그들을 따라 다니느라 해가 가는 줄을 몰랐다. 위험하다고 따라오지 못하게 했지만 그런 말을 들을 우리가 아니었다. 뒤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총을 쏘고 나면 탄피를 주우려 달려들었다. 그 탄피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는데도 서로 주우려 애를 썼다.
그 사람들은 점심을 빵 같은 것으로 때우며 종일 산 속을 헤매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개도 점심을 먹었지만 우리들은 그들이 먹는 것을 구경하면서 침이나 흘릴 뿐이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에서 온 사냥꾼들은 먼저 홈다리 아저씨를 찾아가는 거였다. 아마 일당을 주고 모셨겠지만 그 아저씨가 같이 가면 하루에 꿩 몇 마리는 거뜬히 잡았으니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아저씨가 함께 가면 우리는 따라 다닐 수가 없었다. 그 아저씨는 총을 쏘고 난 뒤에 탄피를 전부 주어다가 자기 집에서 총알을 재생해서 썼기 때문에 우리가 주울 것이 없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온 사냥꾼이 실수로 앞에 나가 있던 개를 쏘아 치명상을 입힌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개를 살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개에게 총을 한 번 더 쏘아 아주 절명시키고는 마을 청년들에게 개를 묻어 달라고 큰돈을 주고 갔다. 묻을 게 따로 있지 개를 묻어? 개는 끄실러 삶고 준 돈으로 술을 사다가 아는 사람들 다 모여 잔치를 벌인 얘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시골 사람들에게 총은 없었지만 꿩을 잡는 것은 겨울철 행사였다. 어른들은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셨지만 청년들은 할 일도 없는 겨울철에 그냥 놀기가 그러니까 꿩을 잡으려고 꿩 약을 만들었다. 광천에 있던 팔구사라는 상점에서 ‘싸이나(청산가리)’를 사다가 그것을 콩에 넣어 산에 놓으면 꿩이 먹고서 죽었다. 싸이나는 아주 위험한 화공약품이라고 했으나 누가 가도 팔아서 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쇠로된 우산살을 갈아서 만든 송곳 같은 칼로 콩 속을 잘 파내고 거기에 싸이나를 채우고는 양초로 구멍을 봉한다. 이것을 산에 가져다 놓으면 꿩이 먹고는 그 자리에서 죽거나 조금 날아가서 죽는다. 그래서 서로 꿩 약을 놓는 구역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꿩이 그 자리에서 죽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날아가서 죽으면 소유권을 가지고 말이 많았다. 사실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가 아닌가?
나는 남이 약을 놓은 자리에 가서 주워올 만큼 담이 크지는 않았지만 용배 산에 갔다가 가끔 죽은 꿩을 주워오기도 했다. 장끼 같으면 조금 커서 한 마리만 주워도 먹을 것이 있지만 까투리는 너무 작아 두어 마리 모아야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고소설 『장끼전』에는 덫의 미끼로 놓은 콩을 장끼만 먹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어디 장끼만 미끼를 먹겠는가? 까투리도 지지 않고 먹었다. 솔직히 까투리를 줍는 것보다는 장끼가 훨씬 더 좋았다. 고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싸이나로 잡는 것은 꿩 만이 아니었다. 중고기나 붕어 배를 따고 그 속에 싸이나를 넣고는 역시 양초로 봉하고 대나무 가지를 써서 냇가 얕은 물에 꽂아 놓으면 청둥오리나 기러기 등이 먹고서 죽는다. 이 새들은 대부분 떼로 몰려와서 자기 때문에 잘 걸리면 정말 여남은 마리씩 잡아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그 때는 몰랐다. 새뜸 누가 이렇게 잡은 오리를 먹고는 그 내장을 두엄에 버렸는데 이웃집 개가 그것을 먹고는 죽어서 말이 많았었다. 그 책임 소재를 가리기가 어려웠을 거였다.
작은 새를 잡는 데는 약을 쓰지 않았다. 꿩은 콩이라도 먹으니 거기에 약을 넣을 수 있었지만 볍씨 같은 작은 먹이 속에는 약을 넣을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농약에 볍씨를 담가 건져서 논에 뿌려 놓으면 새들이 먹고 죽어, 한 번에 수십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어릴 때는 그런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 우리 어릴 때는 새를 잡아먹기 위해서라기보다 겨울철 놀이로 했던 거였다.
그 시절에 누군가에게 들은 얘긴데 지금 생각하면 전혀 말도 안 되지만 어릴 때는 한번 해보고 싶었던 새 잡는 방법이 있었다.
〈북쪽에서 날아오는 철새인 기러기는 밤에 잘 때 꼭 한 마리가 보초를 선다. 기러기들은 의심이 많아 늘 자던 곳에서만 잔다고 한다. 이 기러기들은 낮에는 날아갔다가 저녁에 어두워질 무렵이면 보금자리로 돌아오는데 그런 곳을 알기만 하면 많은 기러기를 잡을 수가 있다. 기러기가 오기 전에 미리 그 근처에 가서 거적을 쓰고 숨어 있다가 밤이 깊어지면 라이터를 꺼내어 살짝 켰다가 끄면 보초기러기가 다른 기러기들을 다 깨운다. 놀라서 깼다가 아무 일도 아니니 그냥 다시 자는데 잠이 들 만큼 시간을 끌다가 다시 라이터를 켰다가 끄고, 다시 켰다가 끄면 기러기들이 열을 받아 보초 기러기를 때려죽이고 다른 기러기가 대신 보초를 선다. 계속 같은 방법을 이용하면 기러기들이 자기들끼리 다 죽이고 한 놈만 남게 되는데 이놈도 너무 지쳐 사람이 나타나도 못 도망가고 잡힌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밤이 깊어 갔으니 그래도 요즘에 TV를 보며 혼자서 노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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