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1. 18:0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없었다. 그래도 라디오 방송은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우리 마을에 전기가 안 들어 와서 전기를 이용하는 제품은 일체 사용할 수가 없었지만 라디오는 건전지를 이용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싼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집은 없었다.
경후네 집에 고장이 난 유성기는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고 그냥 선반 위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올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 시절에는 스피커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집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유선 스피커가 유일한 문화생활의 기기였다.
서울에 와서 살다보니까 유선방송을 연결해서 보라고 광고지가 많이 들어오지만 이 유선은 라디오가 아니라 TV유선 방송이니 그 때와는 격이 다른 거다. 지금 우리 집도 유선을 연결하여 보고 있다. 이것을 연결하지 않으면 TV화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신청했다. 나야 늘 나가서 지내니까 다른 채널이 나온다 해도 볼 시간이 없지만 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께는 이 유선방송이 여러 사람 몫을 하고 있다. 나는 가끔 이 유선방송을 보면서 옛날 시골 유선방송을 생각한다.
지금은 라디오가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고 그 가격도 불과 몇 천 원 정도하는 중국제가 대부분이다. 간혹 지방 대학에서 홍보용으로 중국산 미니 라디오를 보내 주지만 요즘이 어느 시대라고 그런 라디오를 가지고 다니며 듣는다는 말인가?
아이들도 라디오를 들으려면 카세트나 MP3 기기를 쓰는 세상에 겨우 조잡한 중국산 라디오를 가지고 다닐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전에 내가 어릴 때는 집에 라디오가 있느냐는 것이 학교의 가정환경조사서에 들어갔으니 그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서울에는 TV가 한참 보급될 때였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라디오를 가진 집도 볼 수 없었고 그저 스피커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의문인 것은 그 때 집집마다 달려 있었던 스피커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는 거다. 조그만 나무 상자의 한 면은 천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 정말 요즘 전축의 스피커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삐삐선(BB선)이란 선으로 요즘 전기선처럼 거의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스피커를 집집마다 무료로 달아주는 것을 보고 스피커는 원래 값이 안 나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오디오 기기에서 스피커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것을 보고는 내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유선방송에 쓰던 스피커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외국 고물상을 통해 수거해 온 재활용품이었다. 요즘에 아프리카로 보낸다고 가격이 저렴한 예전 사진기를 기능은 보지 않고 작동만 되면 아주 싸게 사가던데, 그 때 우리나라 시골에 들어왔던 스피커도 그런 방식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장곡 가송리에서 송출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얘기가 되겠지만 가송리에 중계센터(?)가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시설을 갖춰 놓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한 곳에서 라디오를 수신 받아 이것을 유선을 통해 보내면 각 부락 가정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이 스피커라는 것은 소리만 나오는 단순한 기능이었지만 소리를 높이고 낮출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주파수를 각 가정에서 선정할 수는 없었다. 라디오처럼 무선으로 전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중계소에서 잡은 전파를 전선으로 연결하여 각 가정에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에 오는 것은 오로지 KBS라디오뿐이었다. 아니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장곡면이 다 그랬을 거였다. 가송리 중계소에서 보내주는 하나의 방송 주파수가 스피커를 설치한 모든 가정으로 흘러갔다. 유선으로 연결된 한 선과 땅에다 박아 놓은 다른 한 선으로 두 개의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고 흙에다 박는 선은 지선이라고 불렀다. 지선을 박은 곳은 습기가 있어야 잘 나와 가끔 물을 뿌려서 습기 유지를 해줘야 좋았다.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이 유선 라디오의 사용료였다. 그러나 그 시절엔 이것마저 부담스런 집은 설치할 수 없었다. 요즘이야 쌀 한말도 아니고 벼 한말은 정말 하찮게 생각하지만 그 시절에는 벼 한말도 없는 집에게는 큰 거였다. 그래서 이 유선방송을 듣지 않는 집도 몇 집 있었다.
내가 삽다리 고모네 가서 보니까 거기도 이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거기는 우리 지역과 달리 KBS와 함께 TBC(동양방송국)가 있어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스피커로 두 개의 방송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술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했으나 아마 난청지역이 많아 제일 잘 나오는 KBS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도시 애들이 TV의 만화 영화를 재미있게 볼 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KBS 라디오 어린이 방송(17시~17시50분), 국군의 방송(18시~18시40분)과 라디오 극장(19시40분~20시)이었다. 이때의 라디오극장은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다.
이때 재미있게 들은 것이 ‘삽다리 총각’, ‘지각한 신부’, ‘억척이, 오 서방’, ‘문간방 사나이’, ‘새마을 아가씨’ 등이다.
여름이면 납량 특집이라고 해서 공포 드라마도 들려주어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하얀 얼굴’과 ‘춤추는 가면’이다. 귀신 나오는 공포물은 화면으로 봐야 더 실감이 나겠지만 귀로 듣는 것도 꽤나 무서웠다. 특히 전기가 안 들어오던 시절이라 어둘 녘에 시그널이 나오기 시작하면 어둠과 함께 공포가 밀려와 어머니가 밖에서 안 돌아오셨을 때는 무서워 떨면서 방송을 들었다.
내가 어려서 들은 대중가요도 대부분 이 스피커를 통해서였다. 간혹 시청자의 편지를 받아서 신청곡을 들려주기도 했고, 여러 프로에 대중가요가 심심찮게 나왔다. 나는 남진과 나훈아를 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여름휴가를 받아 우리 집으로 피서를 오시는 서울 작은 외삼촌이 손바닥 크기만 한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작고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갖고 싶기도 했지만 자주 찍찍거리고 잡음이 나서 라디오는 다 그렇게 소리가 안 좋은 줄 알았다.
우리 집에는 KBS 외에 다른 방송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방송이 제일 좋은 줄 알았다. 방학 때 삽다리 고모 댁에 가서 ‘태
권 동자 마루치’를 들었으나 그것이 당시에는 무척 인기가 있는 드라마였음에도 우리 집에서는 들은 적이 없어 생소했다. 이미 그 무렵에는 흑백 TV가 지방도시까지 보급되고 있었을 때였지만 오서산 아래는 TV는커녕 라디오도 보기 힘들었으니 우리에게는 그 시절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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