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1. 18:0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스톱을 못 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난 고스톱을 치지 못한다. 솔직히 칠 줄은 알지만 고스톱 판에 끼어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은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술자리나 가질 뿐 화투는 잡지 않는다. 학교서도 국어과가 놀러 가면 간혹 ‘섯다’는 하지만 고스톱은 치지 않는다. 난 셈이 느리고 눈치가 어두워 판에 끼어본들 잃지 않을 리가 없고, 또 애들을 가르치면서 애들에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들은 나도 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에 이 나이에 고스톱을 치지 않고 있다.
우리 어릴 때는 놀 거리가 없었다. 여름∙겨울로 방학 때가 되면 밤에 할 일이 없었던 거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TV는 고사하고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켜고 책을 보던 시절이니 등잔 앞에서 졸다가 머리 태워먹기 일쑤였다. 이런 환경이니 밤에 공부하기는 어렵고 그저 모여 노는 것이 더 좋았다. 아이들이 놀기엔 겨울이 더 신이 났다. 여름엔 방학이라도 일하러 나가시는 부모님과 같이 밥을 먹어야 되니까 늦잠을 잘 수가 없지만 겨울 방학 땐 좀 늦게 일어나도 되니까 늦게 자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애나 어른이나 대개 자기 집에서 혼자 지내기보다는 친구 집에 모여서 여럿이 함께 놀았다. 혼자서는 할 것이 없어서였다. 몇이 모여야 윷을 놀던지 화투를 하던지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집이 외돌거나 몇 집이 안 되는 마을 아이들은 꽤 먼 곳까지 마실을 다녀야 했다. 마실을 다닌다는 말은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즐겨 쓰던 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에 간다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모이기 좋아하던 곳은 어른이 안 계시거나 어른들이 있는 방과 떨어져서 놀 수 있는 집이었다. 아무래도 어른들이 계시면 자유롭지가 못해서 그런 거였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은 안성맞춤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는 우리 노는 일에 전혀 간섭을 안 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린 겨울밤이면 끼리끼리 모여 화투를 쳤다. 때로는 동네 형들과도 어울렸지만 끼리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놀이였다. 그때라야 불과 70년대 중반 무렵이지만 어른들은 민화투, 젊은이들은 육백, 애들은 뽕을 쳤다. 나도 뽕을 치는 데는 빠지지 않았고 다른 동네 놀러가서도 뽕을 쳤다.
고스톱은 셋이 치지만 뽕은 셋도, 넷도, 다섯도 심지어는 여섯까지도 할 수 있었다. 고스톱을 칠 때는 다섯이서 한다고 해도 다섯이 치면 둘은 광 팔고 구경하지만 뽕은 다섯이 다 참여해서 같이 할 수 있었다. 다섯까지는 다섯 장을 가지고 치고, 여섯일 때는 넉 장만 가지고 쳤다.
뽕을 칠 때는 단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하 10판에서 보통 20판, 30판을 연속으로 한다. 그리고 계속 점수를 기록해서 총점을 내어 그것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그 순위에 따라 거기에 맞는 돈을 내고 그 돈으로 간식을 사다먹었다.
점수가 적을수록 순위가 내려가서 한 판에서 1등을 할 때는 점수가 0이 된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화투의 끗수를 따져 자기 점수가 되는 거다. 이때에 마이너스 점수도 있었다. 여섯 장, 자기가 가진 다섯 장에 기리에서 하나 더 뗐을 때 이 여섯 장의 숫자가 일정한 순서로 나열되면 그 수를 더한 만큼의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 것이다. 즉 3에서 8까지를 가지게 되면 -33이 되는 것이다.
뽕을 칠 때, 제일 무서운 것이 상대에게 쓰는 거였다. 내가 같은 것을 두 장씩 가지고 있을 때 상대 중 하나가 같은 것을 내면 즉, 내가 이 두 장과 팔 두 장을 가지고 있을 때 경후가 이를 내어놓으면 이 뽕에 오 내어놓고 ‘쓴다’라고 말한 뒤에 누가 팔을 내어놓으면 쓰는 거다. 이때 나는 0이 되고 팔을 쓴 기종이는 자기가 가진 합의 배가 되는 수치를 안게 된다.
나머지 세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합하여 숫자를 기록한다. 그러므로 똥이나 비를 들고 있다가 쓰면 한순간에 40-50점을 받았다. 누구를 씌우지 않고도 먼저 마이너스가 되거나, 같은 것이 두 장씩 셋이 되면 그 판이 끝이 났다.
1등은 돈을 내지 않고, 2등은 10원, 3등은 30원, 4등은 50원, 5등은 70원을 내어놓은 뒤에 1등이 가서 사오면 된다. 나이가 좀 많은 사람들은 액수를 크게 하여 닭을 사다가 삶아먹거나 하기도 했다. 이 뽕이 고스톱보다 좋았던 점은 크게 돈을 잃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사다리 타는 것과 유사할지 모르지만, 겨울밤을 보내기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충청도 근방에서는 다 비슷하였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 놀러가도 그 쪽 아이들과 같이 모여 뽕을 치며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놀이였다고 생각한다. 동네의 나이 든 처녀총각들이 겨울밤에 모여 앉아 뽕을 치는 모습은 70년대 중반의 한 풍속도였다. 그 때는 고스톱이 널리 보급이 안 된 탓인지 노름판에서도 고스톱이 아닌 ‘쬬이’나, ‘도리짓고 땡’을 주로 했다고 한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여자들과 같이 논 적이 거의 없지만 동네 다른 애들과는 자주 놀았다. 경후, 기종이, 기흥이, 치환이, 양환이, 찬호 등과 어울려 뽕을 자주 쳤고, 가끔은 4-5년 선배들과도 뽕을 치며 어울렸다.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에 오서 2회, 3회 동네 애들이 자주 어울려 뽕을 쳐서 생긴 유행어가 ‘기자야 뽕 치러 가자’였다. 그 때는 아마 다른 마을로도 놀러 다니는 애들이 많았던 것 같다.
겨울밤은 길고 긴데 할 만한 놀이도 없고 어린애들이 그냥 앉아있기 보다는 뽕이라도 치는 것이 재미있었을 게다. 그리 크게 잃지 않고 하루 저녁에 몇 십 원이면 입도 심심하지 않았으니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탓할 것도 아니었다.
애들뿐이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면 자주 뽕을 친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거 나이롱 뽕 쳐서 딴 것인 줄 아냐”였다. 즉 어렵게 고생해서 얻은 것을 하룻밤 뽕을 쳐서 따온 것으로 보지 말라는 얘기이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어른이나 아이나 다 고스톱을 친다고 한다. 물론 유행에 시골과 도시의 차이가 어디 있으랴마는 같이 노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따먹기 위한 놀이는 어딘지 씁쓸한 맛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고스톱이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 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 부담 없는 놀이가 더 바람직할 것이라는 얘기다.
누구나 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얘기한다지만 그래도 그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 거기 웃고 울던 주인공들, 지금은 다 그때의 자기들만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애들은 고스톱 치면 안 된다고 무게 잡고 있을 거다.
하기야 그렇다고 이미 사라진 뽕을 다시 칠 수도 없겠지만…….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 묵 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신경림. 「겨울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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