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4. 18:0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나도 밤하늘의 별을 헤던 적이 있었다.
대학 재수를 위해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던 어느 초가을 우연히 본 신문 기사에 서울에서 은하수가 사라졌다는 제목을 보고는 놀란 적이 있다. 분명히 담배 가게마다 은하수가 진열되어 있던데 서울에 은하수가 사라지다니? 그 의문이 풀린 것은 한참 뒤였다. 담배 가게의 은하수가 아니라 하늘의 은하수가 공해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군에 가서, 화천 백암산에서 하늘을 보니 거기 하늘은 온통 알지도 못하는 별들로 꽃밭이었다. 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골서 자라 밤하늘의 별 만큼은 도시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안다고 자부했지만 군에 있을 때만큼 많은 별을 보고 별자리 이름을 알았던 적은 없었다.
나 어릴 때는 늘 부엌에서 불을 때어 밥을 했으니 여름철에도 방에 불을 안 땔 수가 없었다. 물론 여름이니까 겨울보다 훨씬 덜 땠지만 방안은 바깥보다 더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온실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늦도록 마루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방이 식기를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안마당에 사람과 소를 위해 마르지 않은 풀로 모깃불을 놓으면 그 연기에 매워 마루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늘 바깥마당에 밀대방석을 펴고 나가 거기서 놀았다.
멍석은 볏짚으로 만드는 것이라 솜씨가 없는 사람은 짤 수도 없지만 그 무게도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솜씨 좋은 머슴 아저씨들 덕택에 오래 묵어서 낡은 것까지 10개가 넘는 멍석이 있었다. 이 멍석들은 곡식을 말릴 때도 요긴하게 썼지만 동네에 잔치하는 집이 있으면 거기에 가져가 사람을 접대할 때 마당에 까는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멍석은 무거운 대신 한번 만들면 여러 해를 써도 쉽게 헤지지 않았지만 밀대로 만든 밀대방석은 만들기 쉽고 가벼운 대신 오래 쓰지 못하였다. 멍석은 장정들도 혼자 옮기기가 힘들 만큼 무거웠지만 밀대방석은 초등학교 4-5학년 아이라면 옮겨 놓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서 좋았다. 또 바닥에 깔고 앉거나 누워도 그 촉감이 멍석보다는 훨씬 좋았다. 멍석은 볏짚이라 눅눅한 기가 있지만 밀대방석은 밀짚이라 물이 쉽게 빠지고 잘 말라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밀대방석을 깔아 놓고 마을 아주머니들이나 누나 친구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놀러와 같이 있었다. 난 여름방학이면 고모네, 외삼촌네로 자주 돌아다녔고 그런 곳에 갔다가 돌아오면 애들이 궁금해서 나를 찾아왔고 서로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모여야 동네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아는 소식도 전해야 하지만 남들이 알고 있는 소식도 들을 수가 있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던 거다. 그 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고 신문을 보는 집도 거의 없어서 사람의 입을 통한 소식이 제일 많을 때였다.
우리 동네는 땅이 안 맞아서인지 옥수수가 그리 잘 되지는 않았고 많이 심는 집도 드물었다. 주로 밭가에 심어서 집의 아이들 간식거리나 했을 뿐이다. 우리 집도 텃밭 가에 심고 밭둑에도 심어 가끔씩 옥수수를 쪄서 저녁에 내어 놓곤 했으나 나는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즐겨 먹지는 않았다. 아마 그 시절에 우리 고장에서 심었던 옥수수는 품종이 안 좋았는지 요즘 것들만큼 맛이 없었다. 왜 그런가 하면 요즘에 어쩌다 먹어보는 옥수수 맛이 그런대로 괜찮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질보다 양이어서 맛이 좋은 품종보다는 수확이 많이 나는 것을 주로 심었기 때문일까?
예전에 우리 집은 해마다 밀을 심어 그 밀로 국수를 빼고 밀가루를 만들어 일 년 내 쓰곤 했었다. 집의 밀로 가루를 낸 것은 사는 것보다 훨씬 검은색이었다. 이 시커먼(?) 밀가루에 강낭콩을 넣고 찐 빵이 옥수수보다 맛이 더 나았다. 그때는 설탕이 비싸서 단맛을 낼 때는 값이 싼 화학제품인 당원이나 뉴슈가를 넣어, 어려서는 이 당원과 뉴슈가를 무척 많이 먹었다.
밤에 밀대방석에 누워 밀가루로 찐 빵을 먹으면서 하늘을 쳐다보면 고작 아는 별자리 이름이 은하수,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아였다. 은하수나 북두칠성, 카시오페아는 누구나 다 아는 별자리여서 시빗거리가 될 일이 없었지만 북극성에 대해서는 다 다르게 알고 있어 자기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우겨대는 일이 많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뿐이니 북쪽에 조금 밝게 빛나는 큰 별은 다 북극성 같았기 때문이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듣고 까치와 까마귀가 머리로 오작교를 놓느라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말을 확인하기 위해 까치머리를 보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내가 나이 들어서, 중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오영수님의 ‘요람기’를 읽으며 탄복한 부분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누나들에게 별똥별을 먹는다고 들은 것이 그대로 나와 있어서였다.
우리 어릴 때는 냇가에 탄화석이라고 얘기하던 검게 녹은 돌들이 있어 이것을 별똥별이라고 했다.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 머리털 위에 대었다가 떼면 머리털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지금은 그런 돌도 다 사라져 구경하기가 힘들 거다. 요람기에 나온 얘기를 보면서 오영수님과 나하고는 나이 차가 무척 많은데도 내 어렸을 때 보고 듣고 한 것과 왜 그리 비슷한지 많이 놀랐다.
밀대방석에 누워 모기에 뜯기면서도 깜박 잠이 들면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깨우셨다. 여름철이라 해도 찬 기운 때문에 밖에서 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방에 들어가면 모기 때문에 방문을 닫고 모기약을 뿌려야 했다.
요즘이야 에프킬러니 모기매트니 하는 고급스런 것들이 있지만 그 때는 병에 든 모기약을 빨대 같은 기구를 통해 입으로 불어 뿜어야 했다. 모기약 이름이 ‘후막기’였는지 아니면 불어 뿜는 기구가 ‘후막기’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후막기를 불어 뿜어야 모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때 ‘방장’이라고 해서 모기장을 텐트처럼 만든 것이 유행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모기가 못 들어와서 괜찮았다. 그러나 팔이나 다리가 밖으로 나가면 완전히 모기가 회식하는 날이 되었다. 작은 구멍만 생기면 어떻게 알고 들어오는지 들어와 밤새 물어댔다.
요즘엔 모기도 예전처럼 많지 않다고 들었다. 시골 생활 중에 가장 귀찮았던 것이 모기와 파리였는데 파리도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좋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몹쓸 것이 많아서 그런지는 쉽게 판단이 안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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