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4. 18:0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서울에 살면서 영화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문화생활이다. 때로는 가족과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때로는 동료 선생님들과 영화를 보러 다닌다. 나는 언제든 혼자 가지는 않는다. 술집에도 혼자 가는 일이 없지만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어디든 혼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은 괜히 청승 떠는 것 같아서 싫다.
예전에 광성리에 가설극장이 들어왔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오서초등학교가 들어서기 몇 해 전에 광성리 동살뫼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다. 넓은 마당에 가설극장을 설치하고 유료로 영화를 보여주는 거였다. 가설극장이라고 하면 흔히 떠돌이 약장수들이 하던 무료 연극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시시한 연극이 아니라 정말 영화를 상영했다. 영사기를 돌리려면 전력이 필수 요건이라 이 팀들은 발전기(발동기?)를 가지고 다녔다.
동살뫼 골무샅 집 바깥마당에 극장이 만들어졌었다. 긴 장대를 군데군데 세우고 그 밖으로 천을 둘러 들어갈 수 없게 만들고는 한 곳만 입구를 설치하고 거기서 입장료를 받았다. 달구지에 확성기를 싣고 다니면서 선전을 해서 지금도 기억나는 구절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장곡면민 여러분"이다.
그때는 뜻도 이해하지 못한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영화'란 구절도 우리가 두고두고 흉내를 내던 말이다. 한 5일 동안 상영했던 것 같다. 그 영화들은 날마다 다른 것으로 교체하여 보여줬다. 우리 꼬마들이야 영화를 보러 갈 일도 없었으나 신나서 따라다녔다.
그때 여섯 살인가여서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 날 동네 어른들을 초청하여 보여준 '옥단춘전'은 조금 기억난다. 배에 싣고 가서 물에 던져버린 남자 주인공 이혈룡을 옥단춘이 구해오던 장면이다. 할머니 등에 업혀가서 졸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장면은 지금도 생각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장곡 면사무소에서 정부가 홍보하는 내용을 담은 무료 영화를 몇 번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장곡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그런 날은 학교에서 얘기를 듣고는 저녁 먹기가 바쁘게 끼리끼리 모여 면사무소 마당으로 갔다. 김희갑, 황정순, 김지미, 이대엽 등이 나오는 '어제의 팔도강산', '오늘의 팔도강산' 등을 그냥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봤다.
스크린은 나무에 붙들어 맨 흰 천이었고 내가 처음에 보았던 영화는 흑백영화였다. 이런 날은 광성리나 신풍리, 화계리, 오성리 등의 어른들은 오시지 않았지만 보통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스무 살 안팎에 청년들까지 많이들 와서 같이 보는았다.
영화에 팔려 정신없이 보다가 끝이 나면 시간이 열 시가 넘었다. 볼 때는 좋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려면 왜 그리 졸리고 걷기가 싫던지……. 그런 공짜 영화가 있는 날은 꽃밭골을 지날 때 조심해야 했다. 꽃밭골 청년들이 길에다가 허방다리를 여럿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길 한가운데를 깊이 파고 그 안에 물을 부어 놓거나 거름을 넣고는 위를 살짝 덮어 만든 것이 허방다리였다. 그런 곳을 잘못 밟으면 넘어지고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 영화 보러 갈 때는 조심해야지 하다가도 기억을 못해 거기 빠진 사람을 여럿 봤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러니까 오서초등학교 시절 장곡에 해마다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지금의 농협 마당에 극장을 설치했고 이것은 돈을 내야 볼 수 있는 거였다. 그때 20원씩인가 하여 우리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저녁 먹고는 무작정 거기로 갔다. 어떻게 들어갈 방법은 없고 주위에 서성거리다가 영화가 끝날 무렵 천막을 걷어내면 보고 왔을 뿐이다. 한 10분 보자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으니 참 허망한 일이었다.
장곡으로 갈 때야 천막 밑으로 기어 들어가면 된다는 둥, 아는 형이 있다는 둥 큰소리치며 갔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중학교 다닐 무렵에는 가설극장에서 상영하는 것들이 나온 지 몇 년 지난, 폐기되기 직전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래도 거기 가는 것은 낭만이 있었다.
우리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그런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눈 맞은 처녀총각들이 데이트하러 가는 날이었다. 동네서 그냥 만나면 소문나기 십상이지만, 영화구경 간다 하고 나와서는 타동네 처녀 총각이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광천으로 학교를 다니다보니 모든 것이 큰 차이가 났다. 우리야 겨우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지만 광천 애들은 광천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학교에서 가끔 단체로 갈 때는 20원만 내면 볼 수 있었던 그때 광천극장 요금이 70원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가는 단체 영화 관람만 보았을 뿐이나 광천 애들은 영화를 보러 아무 때나 극장에 간다고 하니 많이 부러웠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그런 계몽 영화가 아니라 진짜 영화(?)도 몰래 본다고 했다. 나야 이런 면에서 많이 어두운 시골아이여서 독배에 살던 친구가 그런 얘기를 많이 해주고 나를 깨우쳐(?) 줬다.
한번은 그 친구가 용팔이 영화 시리즈(박노식이 주연한 영화로 여러 편이 나왔다)를 얘기해주면서 아주 재미있다고 했다. 그 얘기 뒤에 마침 ‘용팔이와 영구’라는 영화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돈을 내기로 하고 둘이 극장에 갔다가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 결과로 1주일 집에서 쉬는 정학을 당했다. 솔직히 지금도 불만인 것은 그 영화가 '학생입장가'였다는 거다. 두 주인공인 용팔이(박노식)와 영구(장욱제)가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에 내려가 새마을 운동을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런 영화를 봤다고 정학을 준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교칙은 교칙이라니 따를 수밖에……. 지금 같으면 그런 교칙이 통할 리도 없겠지만 그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던가.
그 시절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콩쿨대회이다. 역시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한 3일간 가요경연대회를 여는 거였다. 각 동네 노래 잘하는 사람은 다 나오는, 요즘 같으면 전국노래자랑 축소판인 셈으로 온 마을 남녀노소가 다 모여들어 시끌벅적했었다. 1등 상이 양은솥, 2등 상이 고무 함지박, 3등 상이 냄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로 광성리나 화계리 냇가에 무대를 세우고 했었다. 반주라야 어디서 빌려온 드럼 하나에 기타 하나 정도였지만 그래도 뭔가 하는 것처럼 흥성거렸다.
이런 콩쿨대회가 열리면 아이들이 제일 신이 났다. 지금과는 다르게 볼거리가 없던 시대이니 뭔가 색다른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런 잔치가 우리 마을에서 열리니 성벌 아이들은 더더욱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중학교 다닐 때, 광천 독배에서 열리는 콩쿨대회에 가 봤더니 거기는 광성리와는 질과 양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 정말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고 광천 지방에서 힘깨나 쓴다는 건달은 다 모여들었다.
나야 노래를 잘 하지도 못하고, 그런 곳에 나갈 용기도 없는 촌아이였지만 거기엔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동기들도 다수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 아이들이 무슨 입상을 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하는 그런 무대에 겁도 없이 나간다는 것이 그때는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런 친구들 틈에 내가 끼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이런 얘기들은, 요즘은 정말 '그 때를 아십니까? '에나 나올 얘기지만 나는 직․간접으로 그런 것들을 다 보고 듣고 했으니 40대인 우리 세대만 해도 도시지역 60대들이나 경험했을 일을 그들과 공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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