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도 한 철이라지만

2012. 2. 24. 18:02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냇가에 살던 새우가 멸종이 된 뒤 새롭게 나타난 새우는 내가 예전에 보았던 새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씁쓸했는데 메뚜기도 그렇다. 요즘 다시 나타났다는 메뚜기는 내가 알던 예전의 그 메뚜기가 아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논에는 메뚜기 천지였다. 언제 알에서 깨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큼 굵직한 메뚜기가 온 들판을 뒤덮었다. 멀리 들판에 갈 필요도 없이 집 앞의 논둑에서만 한 바퀴 돌아도 메뚜기 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날마다 잡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사홉들이 병에 가득 채우거나 길가 강아지풀을 뽑아 한 꿰미씩 잡았다. 메뚜기를 볶아먹는다고 했지만 어떻게 볶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먹은 것만 생각난다.

 

어쩌다가 술집에서 메뚜기 안주를 시켜보면 국산이 아닌지 크기도 훨씬 작은 것 같고 맛도 그 맛이 아니었다. 어디서 양식한 것이라고 하던데 이름만 보고 혹시나 해서 시키지만 늘 역시나 였다. 가을에 살이 통통하게 올라 큼직했던 옛날 메뚜기는 어렸을 때에 보고 다시는 보지 못했다. 메뚜기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벼 잎을 갉아먹고 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메뚜기 때문에 농약을 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고 실제로 보지도 못했다.

 

우리 속담에 메뚜기도 한 철이란 말이 있다. 어떤 것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메뚜기가 벼농사에 해가 되어도 오래가지 못하니 그냥 둔다는 뜻으로도 쓰인 것 같다. 그렇게 한 철로 인식되던 메뚜기가 이젠 농촌에서도 보지 못하는 드문 곤충이 돼버렸다. 요즘 농약을 아주 덜 해서 사라졌던 메뚜기가 돌아오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돌아온 메뚜기가 옛날의 그 메뚜기들이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메뚜기 말고 송장메뚜기도 오서산 아래에서 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요즘은 오서산 아래에 가도 거의 차를 타고 돌아다녀 눈에 띄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 흔했던 송장메뚜기를 본 지가 20년도 훨씬 더 된 것 같다. 송장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긴 것은 메뚜기와 아주 비슷했지만 몸 전체가 갈색을 띠고 있어 송장메뚜기라 불렸던 것 같다.

 

송장메뚜기는 논둑보다 길에 더 많았다. 지금은 시골길도 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풀이 살기 어렵지만 예전엔 넓은 길도 가운데에 뗏장이 있어 아침에 일찍 나가면 신발에 이슬이 잔뜩 묻었었다. 그러니 길 가장자리는 풀이 무성해서 뱀이 나올까봐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송장메뚜기는 이런 길 위에서 많이 보였던 곤충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먼저 알고 몇 발짝 뛰거나 날아서 앞으로 가곤 했었다.

 

길 가장자리 풀섶에는 송장메뚜기보다 땅개비나 딱개비가 더 많았다. 땅개비는 표준말로 방아깨비라고 했으나 오서산 아래서는 애고 어른이고 다 땅개비라고 해야 통했다. 이 땅개비도 먹는 것이라고 했지만 먹어 본 기억은 없다. 이마가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뒤로 깎여 올라간 사람들을 땅개비라고 불러, 성벌 길순이 아버지와 꽃밭골 용주 아버지 별명이 땅개비였다. 그 덕에 길순이와 용주도 친구들 사이서는 땅개비로 통했다.

 

딱개비는 꼭 땅개비 새끼처럼 생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 새끼인줄로 알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거였다. 딱개비는 땅개비보다 훨씬 작지만 두 다리를 모아 쥐면 딱, 딱하고 소리를 내어 딱개비라고 불렀다. 땅개비와 딱개비는 산 아래 밭가에서 본 적이 있다. 이것들은 아직도 버티고 남아 있어 보기만 해도 반갑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풀섶에서 볼 수 있었던 것 중에 여치하고 베짱이도 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잡아서 밀대나 보릿대로 만든 집에 넣어두고 며칠씩 키우기도 했으나 대개는 하루쯤 지나면 죽었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여치를 넣는 집을 아주 예쁘게 만들었지만 나는 만드는 것이나 그리는 것이나 손으로 하는 것은 모두 손방이어서 아예 그런 것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엊그제 친구가 자기 아이들에게 잠자리 잡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실습을 시켰더니 아이가 잡았다가도 잠자리가 퍼드득거리면 놀라서 놓아버리더라는 얘기를 했다. 어려서 잡던 기억이 나서 아이들에게 알려주려 했겠지만 요즘 애들은 다 그럴 거다.

예전에 우리 어릴 때는 대여섯 살 정도만 되면 잠자리를 잡으며 놀았다. 그만한 나이에는 직접 잡을 수가 없어 누가 잡아 주어야만 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정도면 아이들 스스로 잡으려고 했었다.

 

맨손으로 잠자리를 잡으려면 실패 확률이 높아 거미줄 채로 잡는 것이 훨씬 나았다. 껍질을 베껴낸 삼대(대마초 줄기)저릅대라고 했는데 이 저릅대 끝을 세모꼴로 꺾어 한 쪽을 묶은 뒤 초가 아래에 있는 거미줄 몇 개를 말아서 잠자리채를 만들었다. 도시에서는 그물망이 달린 잠자리채나 매미채로 잡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을 살 돈도 없었고 살 필요도 없었다. 저릅대 길이가 2미터 정도 되었으니까 끝을 꺾어 접어도 150센티미터는 되었다.

 

이것을 들고 거미줄을 찾아다니며 보는 대로 세모꼴로 만든 쪽을 대고 둘둘 말면 잠자리 잡는 채가 되었다. 잠자리가 앉아 있는 곳에 가서 살짝 누르면 잠자리가 거기에 붙어 날아가질 못하니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매미는 이 거미줄 채로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높은 곳에 붙어있고 나무 가지에 있어 이 채로 정확하게 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쉽게 잡을 수 있던 매미는 산속 나무에 많았던 찜 매미였다. 이것은 , 하는 소리를 내어 찜 매미라고 불렀다. 높은 곳에 앉지 않고 나무 큰 줄기 가운데에 붙어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매미는 애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높은 데서 종일 시끄럽게 우는 와가리를 잡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TV에서 보면 서울 애들은 망으로 만들어진 매미채로 매미를 잡았기 때문에 높은 나무에 있는 것도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매미를 잡는 데는 시골아이들이 도시아이들보다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우리나라에 오는 제비의 숫자가 몰라보게 줄어 시골에서도 제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농약을 많이 해서 제비가 먹을 곤충들이 다 없어진 것도 한 이유라고 한다. 지금은 농약을 하는 횟수가, 한참 많이 할 때보다 1/4로 줄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적은 횟수는 아닌 것 같다. 이 농약이 없어져야 사라진 곤충들이 다시 나타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즘 곤충들은 농약 속에서도 버티는 질긴 것들이 많다고 한다. 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이런 질긴 것들이 나중에 사람에게 달려 들까봐 겁이 난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다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백석.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 강낭콩을 드문 드문 놓은 밥, 바가지꽃: 박꽃

박각시: 박쥐나비과에 딸린 일종의 나방, 주락시: 나방의 일종

한불: 많은 것들이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

돌우래: 말똥벌레나 땅강아지와 비슷한 벌레의 일종

팟중이: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